정신과 진료실에서 가장 빈번하게 만나는 증상은 의외로 피로다. 우울 불안 불면이 흔하지만 얘길 나눠보면 피로가 대부분 동반되어 있다. 피로하면 쉬어야 하지만 현대인은 쉬는 걸 어려워하고 쉬는 방법을 잘 모르며 막상 쉬려면 불안해한다. 참고 버티는 데 오히려 익숙하다. ‘번아웃’은 다 ‘타버려’ 재만 남고 ‘아웃’되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를 말한다. 완전히 탈진할 때까지 심각성을 깨닫기 힘든 게 함정이다. 자전거의 가속도가 붙으면 멈추기 힘들 듯 ‘번아웃’ 상태에선 오히려 일을 중단하기 힘들다. 속도를 팍 줄이면 자전거가 쓰러질 것 같아 계속 페달을 밟게 되는 상황, 스스로 속도를 늦추거나 결국 사고가 나야 멈춘다.

지난 10일 국회 게시판에는 ‘택배기사들의 휴식권 보장 및 과로사 방지 대책 촉구에 관한 청원’이 게시됐다. 배송 속도 경쟁으로 주요 택배사들이 주 7일 배송제를 시행한 게 배경이다. 한순간도 멈추지 못하고 일해야만 하는 사람들, 그들에게 쉴 권리는 생존권이나 다름없다. 불과 몇 년 사이에 ‘연쇄 과로사 사태’가 있었고 최근에는 심야 로켓 배송을 하던 젊은 노동자가 과로로 사망했다. 국가대표 경기에서 그토록 강조하는 정신력도 다 쓰면 고갈된다. 더군다나 사람은 보조배터리가 없다. 에너지가 소진하면 그걸로 끝이다. 버티는 삶에서 이제는 쉴 수 있는 일상을 말해야 하지 않을까.

쉴 권리를 위협받든, 자발적으로 쉬지 못하든 현대인은 피로하다. 성과주의 사회에서 ‘하면 된다’는 긍정성의 과잉이 오히려 자신을 가해자이자 피해자로 만들 수 있다. 스스로를 극복하려는 강박이 자신을 착취해 탈진할 수 있다는 말이다. 누구나 힘든 날이 있겠지만 애쓰는 날이 너무 많다는 건 뭔가 잘못된 신호다. ‘번아웃’의 내담자는 여행 가는 게 소원인데 당장은 바빠서 못 가고, 중요한 일만 처리하면 떠날 것이라 말했다. 그분은 2년이 지난 현재까지 여행을 가지 못했다. 진료실에서 휴식을 권하면 대체로 후순위로 밀린다. 쉼의 필요성에 공감하지만 투자하는 데 인색하다. 휴식을 일의 잉여분 혹은 시간 낭비로 여기는 한, 중요한 일이 계속 생기고 결국 ‘번아웃’에 허덕일 것이다.

덴마크가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가 될 수 있었던 비결은 ‘휘게 라이프’ 덕분이다. 그들은 일의 성과보다 휴식을 최우선으로 여긴다. ‘휘게’는 편안하고 느리고 단순한 삶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다. 화려하거나 새것보다 오래되고 소박한 것, 은은한 분위기에서 사람들과 함께 유대감을 느끼고 현재에 감사하는 태도 말이다. 실연의 고통에 진통제를 먹으면 효과가 있을까? 황당하지만 일부에서 도움이 된다. 두통 치통과 마찬가지로 실연의 아픔 역시 우리 뇌에서 통증에 반응하는 것이다. 진통제는 고통을 느끼는 뇌의 영역을 진정시킨다. 마음이 아플 때 진통제를 복용하라는 말이 아니다. 우리가 살면서 몸이나 마음을 다쳐 괴로울 때 무엇이 가장 도움이 될까? 고통의 뇌를 진정시키는 안락함 편안함 따스함 화목함 같은 ‘휘게’라고 생각한다.

지친 뇌를 재충전하는 데 과학적으로 입증된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좋은 사람들과 대화하고 자연과 친밀하게 지내며 문화 콘텐츠에 공감하는 것이다. 현대인은 폰을 들여다보며 쉰다고 여기지만, 알고리즘이 선택한 숏폼 콘텐츠를 과다 소비하면 도파민 과잉으로 뇌는 점점 지쳐간다. 진짜 휴식은 행복 호르몬 세로토닌과 연관되며 ‘휘게 라이프’가 세로토닌을 활성화한다. 소중한 사람들과 어울려 음식을 나눠먹고 보드게임을 즐기면 어떨까. 짤방 대신 영화를 보거나 동영상 플랫폼에서 자신이 공감할 수 있는 콘텐츠를 선택해도 좋다. 아늑한 공간에서 차 한 잔 마시며 ‘깊은 심심함’을 느끼고, 소설책을 읽거나 전시와 공연을 즐기는 건 어떤가. 주말에 산이나 바다로 가서 바람과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일몰 같은 자연의 느린 움직임, 그 어둑한 색감을 느끼는 것도 ‘휘게’를 누리는 방법이다.

어떻게 쉬어야 할까? 쉬는 방법론에는 특별한 게 없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쉼을 특별하게 여길수록 오히려 멀어질 수 있다. 자기 자신과 즐겁게 노는 법을 떠올리면 어떨까? 나만의 편안한 방식 말이다. 쉼을 떠올리면 생각나는 장면이 있다. 어느 겨울 새벽, 제주에서 이어폰을 꽂고 조깅하다 우연히 고라니를 만났다. 몇 초 동안 서로 응시하다 큰 눈망울의 고라니는 훌쩍 떠나고 그때 일출의 숲이 펼쳐지며 이어폰에서 잉거 마리의 노래 ‘When October Goes’가 흘렀다. 그 장면,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지만 이대로 시간이 멈춰도 괜찮을 거라는 감각, 그 순간에 포획되어 밀도 높은 감정으로 얼어붙었다. 겨울의 구슬프고 빈한한 풍경이 다정하게 느껴지고 흔들리던 감정도 사라졌다. 지금도 그날 각인된 노래를 반복해서 듣는다. 가끔 찾아오는 그런 특별한 장면을 만나기 위해 지루한 일상을 견디고 산다는 생각, 어쩌면 인생은 그런 순간을 기억의 사진첩으로 남기는 과정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