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그 쪽 길로 방향을 잡습니다. 도중에 한 사람을 보기 위해섭니다. 지하철에서 내려 바다 쪽으로 기울어진 길을 따라 길게 이어진 시장이 있고 그 중간쯤에 궁금한 그 분의 삶터가 있습니다. 바깥의 낮은 의자에 앉아 생선을 다듬거나 안쪽 좀 더 높은 의자에 앉아 책을 읽는 모습은 고요하고 깊은 바다 같습니다. 가게 앞에선 손질한 생선들이 소쿠리에 담겨 마르고 안 쪽 벽엔 그동안 늘어난 책들이 자리를 조금 더 차지했습니다.

꾸덕꾸덕 반 건조된 생선을 사거나 들고 간 책을 보태 얹어두고 잠시 노닥거리는 것은 그 곳을 찾는 이들의 통과의례인지도 모릅니다. 쌓여가는 책들을 보면 나와 같은 마음으로 그 집을 찾는 이들이 더러 있는 것 같습니다. 가볍게 인사를 주고받는 동안에도 그 분은 하던 일을 멈추지 않습니다. 급할 것도 서둘 것도 없다는 듯, 생선 비린내가 묻어있는 손으로 책장을 넘기며 행간 깊이 몰입해 있을 땐 말을 붙이기조차 미안합니다.

요즘은 하고자하면 무엇이든 쉽게 배울 수 있습니다. 가까운 행정복지센터나 도서관 복지관 문화원 등 지자체나 학교에서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합니다. 무료이거나 대부분 적은 비용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경제적인 부담이 거의 없습니다. 등록기간에는 경쟁도 치열합니다. 대학에선 줄어드는 신입생들의 자리를 시니어들이 채웁니다. 배우려는 자리에 나이가 무슨 걸림돌이 되겠습니까.

친구의 언니는 여든이 다 된 나이로 중학교를 졸업하고 연이어 고등학교에 진학해 학업에 전념하고 있다합니다. 함께 영어단어를 외우고 수학문제를 풀며 만학도가 된 언니의 학습도우미가 된 친구는 즐거운 비명을 지릅니다. 이왕이면 대학까지 진학을 시켜드리는 게 좋겠다고 나도 덩달아 들썩거립니다. 무언가를 새롭게 시작하는 것은 설레고 신나는 일입니다. 기회가 오고 마음이 움직이면 때가 온 것입니다. 바로 지금이 아닐까요.

바닷가 모래밭에 플라스틱 의자들이 앉거나 누워 있습니다. ‘누굴 기다리노, 누구 보고 싶은 사람 있나, 나도 좀 앉으까.’ 의자들을 세워주며 중얼거립니다. 주변을 몰려다니는 비둘기 무리는 무슨 얘기를 나누는지 자신의 발자국 위를 밟고 지워진 발자국 위에 다시 발자국을 남기며 주변을 맴돕니다. 날개가 있다는 것을 잊은 듯. 아니, 함께 날자고 부추기는 듯. 그때 폰이 흔들리더니 동영상 하나가 뜹니다.

무너지는 근력을 붙들고 키우는데 라인댄스가 좋다는 지인의 추천에 따라 시작한 지 석 달째입니다. 가서 보니 입문반 여남은 명 중 젤 몸치에다 나이는 또 왕언니라 빠른 음악에 맞춰 손발을 움직이는 게 쉽지가 않습니다. ‘나이가 어딨노, 마음 문제지.’ 그동안 큰소리 치고 다녔지만 몸은 받아들이기 힘드나 봅니다. 하지만 젊고 발랄한 동기들의 배경이 되어 엉거주춤 스텝을 밟는 수업동영상은 주변인들을 기분 좋게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누가 뭐래도 나는 춤추는 꽃/시들시들한 나를 살리고/나른한 마실을 깨우는 거리의 춤꾼//살아 있는 것들은 들썩거려야지/흔들려 신바람을 일으켜야지/손에 든 것도 없이 등에 진 것도 없이/하늘과 땅을 열어 가볍게 건네받는 숨/천천히 번지는 파동을 따라 흔들려 봐봐/물결인 듯 풀잎인 듯 건너편이 흐르잖아//바래가는 몸 햇살 속으로 던져 넣고/오늘도 나는 춤을 춰/당신이 잊어버린 그 곳에서’(권애숙 시 ‘QR 코드, 핫립세이지’ 중에서)

일하고, 배우고, 나누고,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까지 설레게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을 만나기 위해 먼 길도 마다않고 돌아가는 이들도 많습니다. 또 그렇게 누군가는 내가 있는 곳으로도 찾아오고 있겠지요. 아니, 찾아올 수 있도록 뜨겁게 살아야지요. 화려하게 피어 자신의 존재를 시끄럽게 알리는 꽃들보다 보일 듯 안 보이게 피어 실한 열매를 남기는 꽃들이 더 많습니다. 오늘도 그곳은 누군가의 첫발자국을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