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찾는 방문객은 유럽인이 압도적이지만 비서구권 중에선 한국인이 제일 많다고 한다. 여행사이트나 경험자 조언을 찾다 보면 연중 순례길을 즐기기 가장 좋은 시기가 4월과 5월이라는 추천이 많다. 한국과 위도가 비슷한 스페인의 봄은 춥지도 덥지도 않아 걷기에 안성맞춤이다. 이맘때면 치열한 속도 경쟁에 지친 한국인이 청년은 청년대로, 장년은 장년대로 각자 인생의 짐을 메고 뚜벅뚜벅 이 길을 걸어가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보름 뒤 한국에 가면 벚꽃을 볼 수 있나요?” 지난달 중순께 싱가포르 친구의 아들이 부산 여행을 앞두고 이렇게 물었다. 한국 도착 무렵엔 벚꽃이 다 졌을 거라고 하자 무척 아쉬워했다. 이 청년은 지난해 경기대학교에서 교환학생으로 공부하다 2학기가 끝나갈 무렵 비상계엄 사태를 겪었다. “학교와 집에서 ‘전쟁 나는 거 아니냐 빨리 귀국하라’고 난리였어요. 그런데 실제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잖아요.” 한국의 가을과 겨울을 경험한 그가 군 입대 전 한국의 봄이 보고 싶어 재방문 계획을 세운 이유다. 비록 만개한 벚꽃은 보지 못했지만, 노랗게 펼쳐진 대저생태공원의 유채꽃밭은 이 동남아시아 젊은이에게 신비로움을 선사했다.
‘3월 꽃샘 추위’ 때만 해도 이 시기를 넘기면 곧장 더위가 시작될 것이라는 예상이 많았다. 우리가 어느 순간 봄의 실종에 익숙해진 탓이다. 그러나 예측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냉탕과 온탕을 오가는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없진 않지만 완연한 봄 기운이 생각보다 오래 지속되고 있다. 낮 기온이 20도를 넘어서 여름 옷을 꺼내야 하나 하는 순간이면 비가 내리고, 기온이 다시 오를 만하면 세찬 바람이 불어 온도를 낮추는 패턴의 반복이다. 작년 4월과 비교해도 확실히 올해는 최고·최저기온이 2~3도 낮다. 덕분에 피기도 전에 떨어지기 일쑤였던 벚꽃을 시작부터 끝까지 온전히 감상하고, 영산홍과 철쭉의 싱그러움에 흠뻑 빠지는 호사를 누린다.
‘바람 부는 3월과 비 오는 4월이 아름다운 5월을 만든다’는 스페인 속담이 있다. 하얀 목련이 피는 4월과 계절의 여왕 5월은 한국에서도 눈부신 시즌이다. 두번째 대통령 탄핵 후 대통령 선거를 앞둔 요즘, 시국은 한순간도 편할 날 없이 수상하다. 뉴스를 보면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TV를 끄고 산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정치 이견으로 부모 자식이 원수처럼 지내는 집도 적지 않다. 화려한 4월이 지나면 찬란한 5월이 기다린다. 꽃이 피고 열매가 익듯 세상이 계절처럼 순리대로 흐르는 게 이렇게 어렵다.
강필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