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집안 대청소를 하던 중에 팬트리 한 구석에 있던 쌀 포대에 눈길이 갔다. 책이나 영화로만 보던 계엄선포가 현실에서 벌어진 그 밤, 내가 재빨리 한 일은 기본 식료품과 생필품 주문이었는데 그때 새벽배송 패닉 바잉으로 사 두었던 쌀이었다. 덜 불안한 일상으로 돌아온 지금, 덩그러니 한 편에 있는 쌀 포대를 대청소 중에 발견하고선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내 밀려드는 씁쓸함과 함께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이 오롯이 느껴졌다.
1937년, 미국 하버드대학교 남학생 268명이 의학적·심리학적으로 행복한 노후를 결정하는 요인을 탐색하는 목적으로 설계된 연구의 연구대상자로 선발되었다. 이 연구의 참가자들은 후에 제35대 미국 대통령이 된 존 F 케네디를 포함, 세계 최고의 대학에 입학한 금수저 수재 중에서도 가장 똑똑하고 야심찬 남성들이었다. 연구비를 후원한 백화점 재벌 윌리엄 그랜트의 이름을 따서 ‘하버드 그랜트 연구’라고 불리는 이 괄목할만한 종단적 연구는, 1937년에 시작해 1999년 자료 수집을 마치고 이후 방대한 자료의 분석까지 포함해서 75년 남짓 수행되었다. 연구 기간 동안 2년에 한 번씩 참가자들을 대상으로 행복과 삶의 만족도 등을 포함한 다양한 설문조사 자료를, 5년에 한 번씩 건강 관련 자료를 수집했는데, 오랜 기간 막대한 연구비가 투입된 이 연구가 수행되는 동안 연구책임자는 3번이나 바뀌었고 최종 자료수집 시점에 연구참가자들의 사망률은 38%에 이르렀다.
당시 학부 2학년생으로 전도유망했던 하버드 학생들의 일생을 75년에 걸쳐 추적한 결과는 심리학 분야에서 아주 주목받는 종단적 연구로 자주 소개된다. 1967년부터 연구책임자를 맡아 온 하버드 의대 정신과 교수 조지 베일런트의 결론은 이 엄청난 연구의 결과라고 보기엔 다소 시시하다고 느껴질 수 있다. 그는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관계이며, 행복은 결국 사랑’이라고 결론지었다. 한 인간의 성공적인, 즉 육체적으로 건강하고 심리적으로 행복한 노후로 이끄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사회적 계급이나 지성이 아니라 사회적 적성, 즉 안정적인 인간관계로 밝혀졌다. 연구 결과, 40대 후반까지 형성되어 있는 인간관계가 이후 삶의 질을 결정하는데 가장 중요한 변인이었으며, 평범해 보이는 사람이 가장 안정적인 성공을 이루었다.
또한, 이 연구에서는 행복하게 나이 들어가는데 필요한 7대 변인이 도출되었는데 이 결과 또한 너무나 평범해서, 독자들이 ‘고작 이런 것들을 밝혀내려고 그 오랜 기간 동안 막대한 연구비를 투입했다고?’라며 고개를 갸우뚱할지도 모르겠다.
행복한 노화와 관련 있는 일곱 가지 요소 중 첫 번째는 고통에 적응하는 성숙한 자세(즉, 우리 삶에 고통과 시련이 닥쳤을 때 심리적으로 와해되지 않고 잘 수용하며 견뎌내는 태도)였고, 그 다음으로 ‘교육, 안정적 결혼, 금연, 금주, 규칙적인 운동, 적당한 체중’ 순이었다. 행복하게 나이 들어가는데 필요한 일곱 가지 요소 중, 50세에 대여섯 개를 갖춘 106명 중 절반이 80세에 ‘행복하고 건강하게’ 살고 있었다. 반면 50세에 이 요소들 중 세 개 이하를 갖춘 이들 중 80세에 행복하고 건강하게 사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사회과학 연구에서 상관계수 0, 비율 0%, 빈도 0개는 아주 드문 결과이다. 인간의 변산성은 매우 크고 사람이 보이는 반응은 아주 다양하기 때문에 결과 ‘zero’를 발견하게 되는 일은 거의 없는데, 이 결과는 매우 충격적이었다.
나에게 하버드 그랜트 연구는 ‘사랑, 그리고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으로 요약된다. 다행히 몇 시간 만에 해제되긴 했지만, 지난 겨울 어느 밤 계엄선포는 평범한 일상을 뒤흔든 충격이자 대혼란이었다. 몇 개월이 지난 지금, 나에게는 쌀 한포대가 남았다. 조기 대선 정국에 또 다른 혼란이 있겠지만 결국 그 속에서 우리가 살아내야 하는 것은 평범한 일상이고, 이 일상을 소소하게 나누며 같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사랑하는 이들이 몇 명이라도 있다면 그 또한 얼마나 감사한 일이겠는가. 글을 마무리하려니, 순간 몇 명이 떠오른다. 강의도, 연구도, 일도 다 중요하지만, 바쁘다는 이유로 생각만 하고선 연락을 미뤄두었던 나의 소중한 그들에게 전화라도 해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