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들 결혼식 사진하고 돌아가신 애들 아버지 사진이 자꾸 눈에 밟히네. 하필 그날 종일 정어리 썰어 냉장고에 가득 채워놨는데, 한 개 써보지도 못하고….” 명자 언니는 이튿날 문어 잡으러 나가려고 미끼를 준비해놓았는데 냉장고 두 개가 형체도 없이 불타버린 걸 안타까워한다. 일흔살 넘도록 영덕 바닷가에서 물질과 배 타는 일로 생업을 꾸려온 분이다.
나는 언니가 손으로 돌돌 말아주는 자연산 미역을 초장에 찍어 먹는다. 올해는 마을 주민이 미역 채취도 못 하고 이렇게 이재민 임시거처에 모여있다. 울지 않겠다는 다짐이 소용없어지는 오월이다. 봄밤이다. 방파제에서 배로 대피하며 쳐다본 따개비 마을엔 집채만한 불덩이들이 셀 수 없이 날아다녔는데, 그 와중에 누가 비닐봉지에 오줌을 싸서 바다에 던지려다가 온사방으로 흩뿌려져 머리에 맞았다는 얘기가 나와서 우리는 모처럼 웃었다.
“제일로 값나가는 살림이 아니라 사진이랑 미끼가 아까운 거예요?” 내가 명자 언니에게 되물었다. “살림살이 다 생각하면 기막히고 복장이 터져서 살 수가 없지.”
명자 언니 맞은편에 앉아 있던 미자 언니가 말한다. “나도 김장 100포기해서 김치냉장고에 쟁여놨는데, 애들한테 주기도 전에 이렇게 됐어. 애들이 텔레비전을 65인치로 바꿔줬는데 몇 번 켜보지도 못했네.” 미자 언니는 아까 석리에 다녀왔다. 불탄 마을 고양이들한테 사료를 갖고 가서 비탈길 여기저기 놓아두고 왔다고 한다. 걔들이 연기를 많이 마셔서인지 눈동자 새빨개서 치료를 받아야 할 것 같다고 한다. 먹이를 가지고 다가가면 기다리곤 하던 고양이들이 자꾸 무서워하며 도망친다고, 아마도 화재 트라우마 때문인 것 같다고 걱정한다.
두런두런한 소리에 몇 분이 침상에서 일어나 앉으신다. 화재 나기 전날까지 집수리한 아랫집 언니에게 나는 말을 붙였다. “데크공사했는데 불타서 더 속상하죠?” 이 언니를 우리는 한복댁이라고 부른다. 서울에서 30여 년 한복집하다가 귀촌하셔서. “그뿐 아니지. 거실, 방 두 개, 화장실까지 리모델링했어. 하룻밤도 못 자고 불이 나다니! 그 돈이 목숨값이라고 생각해야지. 어쨌든 살았으니 어떻게든 살아지겠지.” 수백 개 금박도장을 불구덩이에서 꺼내고 싶었다고.
한 달 넘은 이재민 신세의 주민은 삼시세끼 밥 주고 약 주고 침도 놓아주지만, 살아도 산 게 아니라신다. 하지만 나이는 거저먹는 게 아니라서 인생이 지상의 임시거주라는 걸 아시는 것 같다. 천재지변 중에 갖고 나오지 못해 괴로운 것은 무엇인지 문득 나는 궁금했던 건데. 이분들은 금붙이나 돈, 농어업 기계보다 더 귀한 것들을 잃으신 것 같다. 살아온 터전, 온종일 바라보던 바다, 가족과의 추억, 젊은 날에 새겨진 시간일지도.
“그러는 자네는 뭐가 제일 아까워? 건질 물건이 있다며 불씨가 다 꺼지기도 전에 집으로 뛰어가더니만, 뭘 좀 찾았어?”
“믿을 수 없어요, 모든 게 남김없이 타버렸어요. 모자 그림 노트북 책 대용량유에스비.” 나는 더듬더듬 끝없이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애착 사물들이 1000개 넘는 파도로 밀려오는 것 같아서 눈을 감았다. “울지 마라. 네가 우니까 우리도 따라 눈물이 나잖아.” 생명 말고는 모든 걸 잃은 분들이 나를 위로하신다. 우리가 마지막까지 붙들고 가야 할 것은 무엇일까? 다 내려놓고 사는 삶이 가능할까? 진짜 모르겠다. 도무지 아무것도 정리되지 않는 심정을 시로 마무리하려 한다. 권선희의 ‘물의 말’이라는 작품인데 여기 누운 주민에게 읽어드리면 시적 상황이나 사투리까지 잘 알아들으실 시다. 그러나 불 끄고 잘 시간이라서, 일부만 여기 옮긴다.
“살아래이/살 거래이/가믄 안 된데이/살아야 한데이/춘자야 인나거라, 인나라, 인나라
구급차가 올 때까지 울며불며 심장 두드리던 해녀들이/춘자 형님 숨 하나 뱉자 가슴 쓸어내리며 주저앉았다/물안경 자국 깊은 얼굴에서 바닷물이 눈물처럼 흘렀다
됐다, 인자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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