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직장 동료가 나를 ‘지기(知己)’라 칭하며 문자 한 통을 보내왔다. 교수 사회는 각자 영역이 분명하고 나름의 경계도 확실한 편이어서, 16년이라는 짧지 않는 교수생활 중 다른 교수님에게 ‘지기’라는 표현은 처음 들어본 터였다. 그즈음 이런저런 일들로 번아웃 일보직전의 위태로운 상황이라고 느끼던 참이었는데, 그 한 단어 ‘지기’에 시선이 머물렀고 무언가 날 선 자락 위에 불안하게 서 있다고 느껴지던 마음이 이내 순해졌다. 갑자기 무장해제가 된 기분이랄까. 내가 누군가에게 지기의 의미였다니, 그 순간 따뜻한 감동과 함께 작지만 확실한 행복감을 느꼈다.

‘지기’의 사전적 의미는 자신의 속마음을 참되게 알아주는 친구이다. 지기는 단순히 오래 알고 지낸 친구와는 다르다. 양적인 시간을 오래 공유한 사이라기보다는, 속마음을 드러내 보일 수 있는 질적으로 친밀한 사이다. 심리학에서 타인과의 정서적 유대를 애착(attachment)이라고 하는데, 지기는 그런 애착관계가 형성된 사람들 중에서도 ‘특별한 친구’의 의미가 부여된 대상이다. 많은 심리학 연구는 ‘지기’의 존재가 단순히 정서적 유대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다양한 데이터로 증명해 왔다.

최근(2024) 미국 미시건대학교에서 실시한 건강한 노화에 관한 조사 결과, 가까운 친구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중년 및 노년층의 웰빙에 매우 중요하다. 미국 50세 이상 성인 3486명을 대상으로 수행된 연구 결과, 90%가 최소 1명 이상 가까운 친구가 있다고 응답했고, 가까운 친구가 있는 응답자 중 79%는 그 친구에게 정서적 지지를 받을 수 있다고 답했다. 반면 정신 건강 상태가 ‘보통 이하’인 집단의 약 50%는 가까이 지내는 친구가 부족하다고 응답했으며, 신체 건강이 좋지 않은 집단의 약 20%는 가까운 친구가 아무도 없었다.

정서적 요소인 친밀감과 인지적 요소인 관계를 유지하려는 노력이 있을 때 우리는 타인에게서 ‘동료애’를 느낀다. 성인 우정은 동료애의 형태로 나타날 수 있는데, 성인 우정과 웰빙에 관한 38편의 논문을 메타분석한 최근 연구(Pezirkianidis 등·2023)에 따르면, 성인의 우정은 웰빙을 예측하거나 웰빙 관련 변인들과 유의미한 정적 상관관계를 보였다. 흥미로운 연구 결과는 성인 우정과 웰빙을 매개하는 변인이었는데, ‘타인에게 중요한 존재로 여겨지는 느낌’과 ‘관계를 유지하려는 노력’이 성인 우정과 웰빙 간 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나는 동료애의 형태로 나타나는 인간관계와 웰빙의 관계를 연계해주는 주요한 두 매개변인에 특히 관심이 갔다. ‘타인에게 중요한 존재로 여겨지는 느낌’, 그것이 일에 치인 어느 날 동료 교수가 보낸 문자에서 본 그 표현 ‘지기’에 시선이 꽂혔을 때 든 느낌이었다. 또 다른 매개변인인 ‘관계를 유지하려는 노력’은 사실 시간의 함수이다. 그 노력은 꾸준해야 하고, 마음 속 한 켠에 동료를 위한 자리를 남겨둬야 하는 영역이며, 시간을 들여야 하는 측면이다. 누군가는 얄팍한 자기계발서에서 이런 내용을 인간관계 유지를 위한 ‘투자’라고 표현하기도 하지만, 본인의 이익을 위해서 들이는 정성이나 시간이라는 투자의 개념이라기보다는 그 자체로 그런 계산 없이도 지기를 위해 마음을 쓰고 시간을 들이는 일은 무척 소중한 일일 것이다.

심리학자로서 늘 마음에 품고 있는 질문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인간에게 무엇이 가장 중요할까?’라는 것이다. 각자의 답이 있겠지만, 심리학자로서 지금까지 내가 찾은 답은 인간관계이다. 한 인간의 삶에서 나와 내 자신과의 관계, 특별한 타인인 가족을 포함해서 나와 타인의 관계보다 더 중요한 것이 또 무엇이 있을까. 인간의 희로애락이 모두 다 그 관계 속에 있지 않겠나. 그러니, 한 개인의 인생에서 지기의 존재는 무척 중요하다. 나의 지기도 소중하고 내가 타인의 지기가 되는 것도 큰 의미를 가진다. 우선은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겠다. 그래야지 ‘타인에게 중요한 존재로 여겨지는 그 느낌’을 확실히 줄 수 있다. 그리고 그 상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는 노력’을 꾸준히 해야 한다.

知己, 속마음을 참되게 알아주는 친구. 이 글을 읽는 지금 이 순간 독자 여러분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누군가가 있기를, 그리고 여러분도 누군가에게 그런 의미가 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