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산청군에 있는 덕천서원을 방문했다. 마침 그곳에서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의 삶과 철학을 배우고 있는 기업가들을 만났다. 이들의 교육과정은 덕천서원을 돌아보고 의령군 승산마을에 가서 기업가 정신을 배우는 것이라고 한다. 필자도 학생들과 함께 그곳을 방문했다. 인접한 진주시 지수면에는 우리나라 대기업의 창업자를 여럿 배출한 지수초등학교가 있는데, 지금은 폐교되었지만, 산업 발전에 공헌한 분들을 소개하는 전시관이 있고, 경영학 관련 책을 집중적으로 모은 도서관이 있어서 이곳도 둘러보았다. 그 안에 있는 ‘경의카페’에 이런 글이 있다. ‘진주 기업가 정신의 뿌리인 남명 조식의 경의사상(敬義思想)을 토대로 ‘자기성찰’ ‘사람존중’ ‘사회책임’을 다하는 올바른 기업가 정신을 사색하는 공간입니다.’
승산마을에서 특히 관심이 있었던 곳은 호암(이병철 회장) 생가인데, 관람객이 많았다. 문화해설사는 이곳이 명당이라고 계속 강조했다. 안내판에도 지세가 융성하여 ‘재물이 쌓일 수 밖에 없는 명당 중의 명당’이라고 되어 있다. 방문객들은 모두 부자의 기(氣)를 받겠다고 들떠있었다. 그런 호암 생가 대문을 들어서자 곧장 눈에 들어온 것은 한옥 사랑채 기둥에 나란히 걸린 주련(柱聯)이었다.
하나의 시를 순서대로 쓴 것은 아니고 좋은 문장을 모아서 걸어놓은 그 주련을 정면에서 보이는 순서로 읽어본다. ‘글을 짓느라 정원의 접시꽃을 다시 볼 틈이 없었다(著書不復窺園葵)’. ‘금석문(金石文)을 찾아서 폭넓게 종합하면 최고의 문장가 구양수와 서예가 조맹부도 낮아 보인다(搜羅金石卑歐趙)’. 명필 김정희 선생의 글씨 추사체로 쓴 주련도 있는데, 용모가 맑고 깨끗한 사람과 글을 잘 짓는 사람을 찬양하는 내용이다. ‘정신은 가을물 같고 골격은 옥 같다(秋水爲神玉爲骨)’. ‘문장은 바다 같고 붓은 서까래 같다(詞源如海筆如椽)’.
이 집을 찾았을 때 모두가 기업 성공의 비결에 관심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주련은 다만 좋은 글을 찬양하는 시일 뿐이다. 사랑채 기둥의 측면에도 ‘시를 지을 때 좋은 구절을 얻으려면 푸른 대숲에서 학을 만나야 하고(得句會應綠竹鶴)’ ‘붉은 나무 푸른 산은 시를 짓기에 합당하다(紅樹靑山合有詩)’는 주련이 있으나 역시 돈 버는 일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삼국지’나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는 정치가나 기업가에게 도움이 되는 실제적인 지식이 담겨있다. 기업가의 사무실을 방문해서 보면, 이런 고전을 현대 경영학의 관점에서 재해석한 자기계발서가 서재에 가득하다. 기업가들은 금융기법과 같은 전문 지식은 대학이나 기업 실무에서 습득할 수 있지만, 또한 나름대로 기업을 발전시킬 방법을 알려고 한다. 그래서 그 바쁜 와중에도 덕천서원을 방문해보고 대기업 창업자의 생가를 찾아가 보는 것이다. 그런데 호암생가에서 본 주련은 순수 인문학이었다. ‘시문(詩文)을 공부하라’는 그 말이 매 순간 생존을 위해 경쟁하는 기업가들에겐 너무나 한가하게 들릴 것이다. 그렇지만 굳이 호암생가까지 가서 어떤 특별한 무엇인가를 얻고자 한다면 그런 주련을 단 사람의 마음을 알아야 한다.
순 한문으로 된 읽기 어려운 이 주련에 대해서는 대부분이 관심이 없었다. 그렇다면 이 주련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이 집을 찾아오는 사람이 잘 볼 수 있는 위치에 걸어놓았지만, 사실 이 주련을 가장 많이 본 사람은 방문객이 아니라 이 집에 산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이것은 집안사람들이 스스로 다짐하는 글이다. 호암의 유년시절에도 이 자리에 걸려있었는지 알 수 없으나 시와 문장을 숭상(崇尙)하는 이런 주련으로도 그들이 교육하고자 했던 가치관을 짐작할 수 있다.
사랑채 뒷면까지 사방의 기둥에 철학적인 글이 걸려있는데, 초서라서 읽기 어렵지만 해석해보면 이런 뜻이다. ‘(욕망이 속박하는) 사람의 몸 이외의 것에서 취미를 찾아라(得趣形骸以外)’. ‘인(仁)과 의(義)는 몸을 단속하고 수양하는 데에서 이루어진다(仁義成於束修)’. ‘부모에 대한 효도와 형제에 대한 우애는 인간의 그 선한 본성에 뿌리를 둔 것이다(孝悌根其本性)’.
이런 글을 읽고 나서야 덕천서원 경의당(敬義堂)에서 품었던 의문이 풀렸다. 인간의 선한 본성을 믿고 마음의 주인이 되는 경(敬) 공부에 집중하면서 일상에서 올바름(義)의 가치를 실천하라는 남명의 가르침과 인문학 정신을 호암생가 사랑채에 걸린 주련에서 다시 볼 수 있었다. 시(詩)와 한문으로, 그리고 글씨도 행서 또는 초서로 격조 있게 써서 은밀하게 이해할 수 있는 사람만 알아보게 했다. 이제 좋은 글을 완미(玩味)하라는 주련이 걸려있는 고졸한 그 한옥 사랑채 마루가 단지 한번 관람하고 지나가는 공간이 아니라 이곳을 방문하는 기업가들이 인문학의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는 그런 자리가 되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