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의 시간이란 저마다의 생체리듬으로 말한다. 땅끝 해남. 글을 토해내는 집 ‘토문재’에서 가을을 마중하는 중이다. 길 끝에 닿아야 새길이 보이듯 끝은 곧 시작이라는 일상의 말이 땅끝에서는 곡진한 문장으로 펄럭인다.
이곳에서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지나온 길을 본다. 해남버스터미널에서 281번 버스 타고 오던 길에 보았던 이정표를 하나씩 하나씩 접는다. 바다가 감싸고 있는 마을을 보면서 하루를 시작하고 정리한다. 물빛이 달라지는 시간. 인간의 관념을 들이대지 않아도 저절로 그러한 때, 토문재에서는 사람의 말은 내려놓아도 좋다. 해가 오는 곳과, 해가 가는 곳을 따라 눈이 가고 발이 가면 그만이다. 애써 의미부여를 하지 않아도 그냥 보고 그냥 들으면 된다. 눈을 감았다 뜨고 다시 감으면서 바람이 흐르는 길에 더불어 흐를 뿐이다.
버스도 드문 이 길엔 사람보다 풀벌레가 먼저 일어난다. 새벽 풀벌레 소리는 풀처럼 부드럽다. 바다가 풀어낸 안개에 온몸을 부비며 내는 풀벌레 소리는 그래서 몽환이다. 몽환이 건네는 직설에 흐트러진 육체를 바로 세운다. 풀벌레 소리가 잦아들 때면 새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새소리가 오던 곳으로 귀를 열고, 눈을 열고 걸음을 연다. 한 몸처럼 들고 다니던 전화기도 밀쳐두고 소리가 시작된 숲을 우두커니 본다. 하염없이 본다.
새벽엔 비가 다녀갔나 보다. 댓돌 아래 둔 운동화가 비에 젖었다. 마루 끝에 앉아 끈을 풀었다. 관념이란 묶인 운동화 끈처럼 나를 결박시킨다. 끈을 풀어 젖은 신발을 말리듯이 내가 가둔 나를 풀어준다. 익숙한 것으로부터 떨어져나와 불편함이 주는 평온을 느리게 느리게 익힌다. 이곳에선 바람도 말을 한다. 아니 흔들리는 모든 것이 말을 한다. 바람의 말은 분석하려 들면 이내 부서지고 만다. 사람의 언어가 박제된 관념을 만든다면 바람의 언어는 언제나 야생으로 있다. 형태 없는 바람의 말은 형상이 되어 날마다 새로운 문장을 토해낸다.
인근 너른 밭엔 참깨 꽃이 여전하다. 보랏빛이 밀어내는 하얀 깨꽃은 한낮 땡볕 아래서도 고소하게 핀다. 너울너울 이파리 아래 자리 잡은 호박은 펑퍼짐한 엉덩이를 깔고 수더분하게 익고 있다. 옥수수는 붉은 수염으로 속내를 보이고, 녹두꼬투리는 까맣게 변색을 시작했다. 종일토록 그것들을 보고 있으면 사람의 말은 잊어버릴 수밖에 없다. 사람만이 문장을 가지는 게 아니다. 존재하는 것은 저마다의 길 위에 저마다의 문장을 가진다.
아침 6시, 농부의 출근 시간이다. 칠순의 밭 주인은 유모차를 밀며 비탈을 올라 온다. 밭머리에 이르러 허리를 편다. 비에 넘어진 고춧대는 끈으로 묶어 세우고, 제멋대로 뻗어 나간 호박 넝쿨을 거두면서 밭고랑을 살핀다. 제 빛깔로 익은 작물은 거두고, 고루고루 볕이 들도록 틈을 열어준다. 애써 채운 속이 속절없이 허물어지지 않도록 밖의 때를 알아, 안의 때를 살피는 농부는 작물의 문장을 읽어내는 사람이다. 섬세한 감각으로 미세한 자연의 떨림을 알아 작물을 헤아려주는 사람이다.
공책 만한 스펀지를 밭고랑에 깔고 키 낮춘 할매, 녹두를 딴다. 안개가 밀어내는 먼 뱃고동과 덤불에서 떨어져나오는 녹두 소리에 고요가 일렁인다. 안개 짙을수록 한낮은 더욱 뜨겁다. 손이라도 보탤 양으로 슬몃 녹두 덤불을 잡고 앉았다. 여느 콩보다 작은 녹두 알이 녹황색으로 익었다. 여남은 놈이 한통속이라며 농 아닌 농을 주고받으며 한참을 웃었다. ‘요놈이 요래 익을 때까지 얼마나 갑갑할까요잉. 다글다글 여물어가는 일도 쉽지 않으요잉’ 콩 따듯 톡 떨어지는 할매의 말이 주련처럼 걸렸다. 그럴 때마다 나는 손을 멈추었다. ‘하나가 비틀고 나가버리면 다른 놈도 못 익어.’ 할매는 녹두의 문장을 한꺼풀 한꺼풀 풀어주었다.
녹두밭은 인간 사회의 축소판이란 생각이 얼핏 들었다. 우리 사회가 직면한 다양한 현상과 공동체의 운명 같은 사회언어들이 할매의 녹두밭에서 놀고 있었다. 부분과 전체, 개인의 욕망과 딜레마, 상호 신뢰, 아름다운 연대라는 말들을 한 뼘 안 되는 녹두꼬투리가 품고 있다. 모두가 잘 익어가는 세계는 부당함과 억울함이 없어야 한다. 노동이 제대로 가치를 얻어야 하며 늙어가는 것이 두렵지 않아야 한다. 어른은 청년에게 부끄럽지 않아야 하고, 청년의 미래는 아름다워야 한다. 지도자는 동물적 감각으로 세계를 읽어 따뜻한 감성으로 국민의 정서를 헤아려야 한다.
살아가는 일이 녹록지 않을 때 누군가의 위로는 불안을 견딜 수 있는 힘이 된다. ‘요놈이 요래 익을 때까지 얼마나 갑갑할까요잉’ 나만 힘들면 세상이 밉지만 나만큼 힘든 사람이 많다 생각하면 그것이 또 위로가 된다. 이 세상에 나를 알아 헤아려주는 단 한 사람만 있어도 다시 일어나 걸을 수 있는 용기가 생긴다. 아는 게 없다는 땅끝 마을 할매는 오늘도 아침 6시 출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