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부산 원도심 4개 구의 통합 논의가 지역의 큰 이슈였다. 지역소멸이 현실로 다가온 원도심 재생 방안으로 4개 구를 하나로 합치자는 통합 논의는 큰 관심사였다. 그 필요성에 시민단체도 부응했고 부산시도 적극적이었다. 그러나 이 통합 논의는 지역 정치인을 중심으로 한 반대론자들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좌초되고 말았다. 필자는 통합을 위한 공청회장에서 행정통합이 얼마나 어려운지 눈으로 확인했다. 그들의 반대는 필사적이었다. 그런데 지금 원도심 통합 논의가 종종 언론을 통해 나오고 있다.

2020년. 부울경 특별지방자치단체(부울경 메가시티) 광풍이 지역을 휩쓸었다. 신산한 과정을 거쳐 어렵게 2021년에는 부울경 특별지자체 규약이 성립되었고, 규약안이 행정안전부 승인을 받았다. 부울경 메가시티는 정식 출범만을 앞두고 있었다. 하지만, 새로 선출된 단체장들 간의 합의가 성립되지 않으면서 부울경 메가시티는 너무나도 허무하게 끝나고 만다. 2022년. 이번에는 부산경남 행정통합 논의가 시작되었다. 부산과 경남을 하나로 합쳐 완전한 자치권을 가진 분권형 통합 지방정부를 구축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 2024년에는 행정통합을 위한 공론화위원회를 출범시켰다. 지역순회 공청회를 모두 마친 공론화위원회는 금년 하반기 중 기본통합안을 마련하고, 이에 관한 의견서를 양 시장·도지사에 전달할 계획이라고 한다.

2020년 부울경 메가시티 논의 당시에 비해, 2022년 시작된 부산경남 행정통합 논의는 뜨겁지가 않다. 위원회의 활동도 주민의 관심과 언론의 주목을 크게 받지 못하고 있다. 아마도 잦은 통합 논의에 대한 피로감과 내년 지방선거에 따라 통합 논의가 또 어떤 운명에 처할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리라.

새정부가 전국 5개의 대도시권과 3개의 특별지자체를 통한(5극3특) 지역균형발전 방안을 발표하면서, 다시 부울경 행정통합이 주목을 받고 있다. 일부는 지금이 적기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필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부울경이 행정통합이든 메가시티든 연합을 할 수 있었던 가장 적기는 지난 2022년이었다. 당시는 중앙정부의 강력한 지원과 법률적 지원이 뒷받침되고 있었고, 수십조 원의 재정적 지원도 제시되고 있었다. 어느 정도 여론도 형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때와 다르다. 행정통합을 구체화할 수 있는 정치적 지형이나 여건이 조성되어 있지 않다. 울산은 이미 ‘해오름 동맹’이라는 이름 아래 포항 경주 등과 경제동맹을 독자적으로 추진하고 있고, 경남에서는 서부 경남지역의 행정통합 반대 여론이 여전히 견고하다. 여기에 가장 중요한 주민들의 관심이 없다. 더욱이 통합으로 자신의 기반을 잃게 될지도 모를 지역 정치인들의 반대는 필연이다. 행정통합을 얘기는 하지만 서로의 속내는 다르다. 구밀복검(口蜜腹劍)이라고, 입에는 꿀을 머금고 있지만 속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필자는 이제 행정통합 논의를 넘어 연대와 협치의 시대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 부족 사태를 겪는 강릉 사례처럼, 지자체 홀로 모든 사무를 해결할 수 없다. 때론 독자적으로 정책을 행해야 하지만, 환경 복지 등 사안에 따라서는 이웃 지자체 혹은 중앙정부와 연대하면서 수행해야 할 일이 많다. 행정통합으로 중앙으로부터 많은 권한과 재원을 이양받아야만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언제 이루어질지 모르는 행정통합에, ‘부울경은 한뿌리’라는 호소만으로는 주민을 설득하기 어렵다. 지금 부울경에 필요한 것은 상호 간의 연대와 협력이지, ‘통합’의 구호가 아니다. 부울경이 고유의 정체성은 갖되, 광역 차원의 문제는 공동으로 현명하게 풀어가야 한다. 이것이 바로 연대와 협치의 정신이다.

세계 여러 나라의 사례가 이를 잘 보여준다. 일본의 간사이 광역연합은 오사카 교토 고베 등 광역 지자체가 참여해 환경정책, 방재, 의료 등 주민 생활과 직결된 사무를 함께 처리한다. 개별 자치단체의 권한은 존중되면서도 광역 과제는 공동 대응으로 해결한다. 독일 슈투트가르트 지역연합도 마찬가지다. 무려 179개 기초자치단체가 참여해 교통, 도시계획, 환경정책을 추진한다. 독립성을 보장하면서도 협력을 제도화한 결과, 해당 지역은 독일 내에서도 높은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다.

이제는 행정통합에 대한 인식 전환을 했으면 한다. 행정통합 논의에 따르는 지역 간의 갈등과 반목을 넘어, 지역 간의 연대와 협치로 나아가야 한다. 이를 통해 당장 시급한 부산의 물 문제를 해결하고, 부울경 지역을 하나로 묶는 도로망을 확충하는 등 긴급한 사안부터 하나하나 협력해 갔으면 한다. 그렇게 연대와 협치가 쌓이면 통합의 길은 자연히 열릴 것이다. 사람의 인생살이에 순리(順理)가 있듯, 행정통합에도 순리가 있는 법이다. 그 순리가 무엇인지 위정자들은 잘 생각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