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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수의 그림산책] 이당 김은호의 노안도

  • 황정수 미술평론가
  •  |   입력 : 2025-10-26 18:52:03
  •  |   본지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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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척에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의 거처였던 ‘운현궁’이 있어 자주 발걸음을 한다. 고종을 임금으로 내세워 권력의 정점에 이르기까지 파란만장한 곡절을 겪어야 했던 이하응의 평생이 담겨져 있는 곳이다. 역사적 사실도 인상적이지만 현전하는 건물 주변의 모습도 볼만한 것이 많다. 조선시대 귀족층의 삶을 대표하는 건물도 우람하거니와, 정원의 꽃들도 계절마다 제 모습을 뽐내고, 이웃에 드라마 ‘도깨비’의 배경이 되었던 아름다운 서양식 건물 양관(洋館)도 있어 볼거리가 많다.

이당 김은호의 노안도.
운현궁의 건물 중 가장 사연이 많은 곳은 이하응의 식객들이 드나들던 사랑채 ‘노안당(老安堂)’이다. 노안당의 편액은 이하응의 스승인 추사 김정희의 글씨인데, 생전에 쓴 것은 아니고 사후에 좋은 글씨 중에서 골라 집자한 것이다. 집자이긴 하지만 현전하는 김정희의 글씨 현판 중에서 가장 좋은 것 중의 하나로 꼽힌다. ‘노안’은 ‘논어’ 가운데 ‘노자(老子)를 안지(安之)하며’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으로 ‘노인을 공경하며 편안하게 한다’는 뜻이다. 대원군의 노후가 편안하기를 바라는 뜻에서 이름 지은 것이다.

이하응이 대원군이 되자 많은 권세를 탐하는 자들이 환심을 사려고, 저명한 화가의 ‘노안도(蘆雁圖)’를 선물했다고 한다. 이하응의 사랑채가 ‘노안당’이고, 그림의 제목이 ‘노안도’이니 한자는 다르나 발음이 같아 아부하는 마음을 담아 선물을 한 것이다. 실제 노안도의 ‘노안’이란 말에는 늙어서 편안하기를 바라는 뜻이 있기도 하다. 당시 노안도로는 라이벌이라 해도 좋을 만한 오원 장승업과 석연 양기훈의 것이 유명했다. 특히 장승업의 노안도는 귀물이었는데, 이러한 솜씨는 안중식, 김은호에 의해 이어져 내노라하는 집안의 벽면을 장식했다.

근대기 이후 ‘노안도’는 주로 선물용으로 많이 그려졌다. 노후가 편안하라는 의미로 환갑이나 새해 선물로 많이 제작되어 널리 퍼졌다. ‘노안도’로 가장 인기가 있었던 화가는 단연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 1892~1979)였다. 김은호는 안중식의 필법을 이어받아 안정된 구성을 바탕으로 정확한 묘사와 매끄러운 필치를 보여 장식적으로도 매우 뛰어났다. 김은호 ‘노안도’의 인기는 그의 생전뿐만 아니라 제자들에게까지 이어져 동양화의 전성기 첨병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유행도 아파트 문화가 널리 퍼지고, 새로운 세대가 한자 문화에서 멀어짐에 따라 서서히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마침 1960년대 쯤 김은호가 그린 세련된 ‘노안도’ 한 점이 눈에 띄었다. 예전 같으면 애호가들의 눈길을 독차지 했겠지만, 시절이 그런지라 외롭게 한쪽 구석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동양화 전성기에는 생기 있었던 기러기의 매끈한 몸도 맥이 풀려 보인다. “만 리 강물에 뜬 나뭇잎 같은 몸이여 / 올 때엔 눈 내리더니 떠나려니 다시 봄일세 / 남쪽 하늘 북녘 땅 해마다 떠도는 길손 신세 / 다만 갈대꽃이 있어 고향사람처럼 반기는구려”라는 단정한 필치의 화제 시구도 정처 없는 나그네의 쓸쓸함을 보여주는 듯하다. 먼 길에 힘없어 보이는 기러기의 몸짓이 마치 새로운 문물에 치여 갈 길을 잃어버린 동양화 신세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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