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경남 하동군 악양면 일대에서 열린 2025 지리산 걷기축제의 주 행사인 ‘지리산둘레길 소풍’에 다녀왔다. 동정호에서 출발해 최참판댁 입구를 거쳐 입석마을 대축마을 미점마을 개치마을 등 박경리 소설 ‘토지’의 무대인 최참판댁과 악양 들판을 둘러싼 여러 마을을 두루 걸었다. 비가 오락가락하는 중에 비옷과 우산을 갖춘 이들이 황금빛으로 물드는 들판 길과 대봉감이 익어가는 과수원 사잇길을 줄지어 걸었다. 참가자들은 중간에 막걸리 한 잔을 걸치고 함께 점심을 나누며 느긋하게 다섯 시간에 걸쳐 걸으며 하동의 가을을 만끽했다.
입석마을에서는 악양막걸리, 대축마을에서는 지역 농산물로 만든 나물 밥상, 미점마을에서는 역시 지역에서 난 매실로 만든 매실 음료수를 참가자들에게 제공했다. 수백 명분의 점심을 준비하기 위해 주민들이 나섰다. 전날 매계마을에서 만난 한 80세 할머니는 종일 주민들이 모여서 열과 성을 다해 김치를 담갔다며 다음 날 걷기축제에도 꼭 가서 함께 걷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이처럼 주민들이 직접 가꾸고 거둔 채소와 나물로 만든 반찬은 맛깔났다. 출발 겸 도착 장소에 설치한 지역 상품 판매 부스에서는 참가자들에게 나눠준 축제 상품권으로 물품을 구매할 수 있도록 했다.
이 행사와 더불어 9월과 10월에는 걷기 축제 프로그램의 하나로 지리산둘레길이 걸친 경남 함양군과 산청군, 전남 구례군, 전북 남원시, 장수군에서는 주민과 함께 숲과 마을, 문화와 역사를 만나는 지리산 탐험대가 운영됐다. 이 프로그램도 지역과 밀착한, 지역민과 함께하는 프로그램이다. ‘야생의 숲으로 들다’란 제목으로 삼정산 자락에서 진행한 함양 프로그램은 지리산둘레길이 지나는 연못과 도랑에 사는 생물들, 원시림과 관리하는 숲의 차이를 보여줬다. 산청에서는 ‘지리산의 가야 이야기’로 구형왕릉 일대에서 가야에 얽힌 지리산 이야기를 들려줬다. 다른 지역도 마찬가지로 사찰과 마을, 숲을 잇는 길을 걷고 해당 지역 농산물로 만든 점심과 간식을 제공했다. 이번 지리산둘레길 축제를 보면 보통 둘레길로 불리는 걷기여행길이 지역과 함께하는 방법이 어떠해야 하는지 잘 알 수 있다. 마을과 마을을 잇고 들판을 가로지르고 강줄기를 따라 걷는 둘레길과 지역 주민의 관계를 잘 보여준다.
지리산 둘레길 걷기축제처럼 전국의 여러 걷기여행길이 주민 속으로 들어가 주민과 함께할 방법을 적극적으로 모색한다. 마을을 지나는 길은 주민의 삶에 이런저런 방식으로 간섭 또는 관여하게 된다. 마을 길을 지나는 도보 여행자들을 반기는 주민도 있고 꺼리는 주민도 있을 것이다. 도보 여행자들이 주민을 배려하며 걷는 건 당연한 일이고 주민들에게도 마을을 지나는 둘레길에 관심을 두고 참여하도록 이끄는 유인이 필요하다. 주민을 둘레길의 구경꾼이 아니라 주체로 만들어야 한다. 그런 방법 중 중요한 일이 길의 운영과 관리에 주민이 참여하도록 하는 것이다.
평상시에도 둘레길 관리 주체가 주민들과 함께하는 방법을 두루 찾지만 특히 걷기 축제에서 주민 참여가 두드러진다. 대표적인 걷기여행길인 제주올레 걷기축제는 올해 사흘 동안 17~18코스에서 진행되는데 일자별로 마을 부녀회가 마련한 식사와 올레길 선상 식당들의 다양한 도시락까지 제주에서 만날 수 있는 마을 먹거리를 점심으로 제공한다. 지난봄에 열린 경기도 여주의 여강길 걷기축제와 강원도 강릉의 강릉바우길 걷기축제도 정해진 코스를 함께 느리게 걸으며 지역 음식점에서 점심을 해결하고 지역 특산물을 구매하도록 했다. 여강길 걷기축제는 여주시 중심가의 세종시장과 한글시장을 지나며 사전에 참여를 원한 식당과 카페의 문을 도보여행자들에게 활짝 열어두었다. 참가비를 내면 당일 걷기축제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상품권을 제공해 점심과 뒤풀이까지 해결할 수 있다. 국가숲길인 속리산둘레길에서는 지역민과 함께 ‘숲길도 걷고 시장도 보고’ 행사를 열어 속리산 지역에서 생산된 농산물 직거래 장터를 열기도 했다.
많은 지역의 걷기여행길에서 지역에서 유래한 간식을 제공하고 길을 걸으며 지역 음식점을 이용하고 지역 농산물을 사도록 해 참가자와 주민이 상생하는 걷기축제를 마련한다. 부산의 갈맷길과 역사가 비슷한 다른 지역의 걷기여행길에서 열리는 축제를 바라보면서 부러운 한편으로 아쉬움을 느낀다. 갈맷길은 길을 걷는 도보여행자의 숫자는 다른 지역의 유명 걷기여행길에 뒤지지 않는다. 하지만 길 주변 주민의 참여와 관심을 이끄는 제대로 된 걷기축제는 자리 잡지 못하고 있다. 대도시라는 특성과 한계가 있겠지만 극복할 수 없는 장벽은 아니다. 지자체가 지원하고 길을 관리하는 민간단체가 지역 주민의 힘을 모아 함께 여는 축제를 부산에서도 열지 못하리라는 법은 없다. 갈맷길과 관련한 여러 주체의 의지와 역량의 문제다.
이진규 편집국 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