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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희의 클래식 인사이트] 달빛 아래의 탐색

김준희 고려대 외래교수

  • 김준희 고려대 외래교수
  •  |   입력 : 2025-11-16 19:35:44
  •  |   본지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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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바람이 부는 가을 바다 위에 달빛이 내려앉으면, 세상은 잠시 숨을 멈춘 듯 고요해진다. 그 빛줄기 사이로 문득 루트비히 판 베토벤(1770~1827)의 선율이 들려오는 것 같다. ‘월광’이라는 이름은 시인이자 출판업자였던 루트비히 렐슈타프가 첫악장을 듣고 “스위스 루체른 호수 위를 비추는 달빛처럼 느껴진다”고 말한 데서 비롯됐다. 하지만 정작 베토벤은 ‘달빛’이라는 낭만적인 이미지와는 거리가 먼, 훨씬 더 깊은 고독한 세계를 그려냈다.

월광소나타를 작곡할 무렵(1801년)의 베토벤 초상화. 출처=위키백과
이 작품은 베토벤이 이탈리아 출신 제자 줄리에타 귀차르디에게 헌정한 곡이다. 그는 귀족 사회의 제자에게 연심을 품었지만, 사랑은 신분의 벽과 청력의 이상 앞에서 무너졌다. 줄리에타는 결국 다른 남자와 결혼했고, 베토벤은 그 상실의 시간을 음악으로 견뎠다. 영화 ‘불멸의 연인’은 그 비극을 드라마틱하게 재현한다. 귀가 들리지 않던 베토벤이 피아노에 온몸을 기대고 이 곡을 연주하는 장면은 허구에 가깝지만, 세상과 단절된 어둠 속에서도 그 소리를 ‘느끼려’ 고군분투했던 그를 상징적으로 나타냈다.

서른을 갓 넘긴 청년에게 세상이 점점 멀어지는 경험은 음악가로서는 치명적이었다. 소리가 사라진다는 것은, 자신이 존재하던 방식이 무너지는 일이었다. 세상과의 관계가 하나씩 꺼져가는 침묵의 절벽이었다. 하지만 베토벤은 그 앞에서 주저앉지 않았다. 그는 다시 피아노 앞에 앉아, 남은 감각으로 세계를 더듬었다. 손끝은 건반의 미세한 진동을 기억했고, 음악이라는 언어로 풀어냈다. 베토벤에게 음악이란 침묵 속에서도 들을 수 있는 또 다른 청력,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마지막 언어였다.

‘암중모색(暗中摸索)’. 베토벤은 어둠 속에서도 끝까지 들으려 했다. 어둠 속에서 손끝으로 길을 더듬듯, 그는 피아노의 울림 속에서 인간의 가능성을 찾고 있었다. 1악장은 잔잔한 셋잇단음표 위로 희미한 선율이 흐르며, 밤의 고요와 마음의 파동이 맞닿는다. 프랑스의 작곡가 헥터 베를리오즈는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한 편의 시”라고 평했다. 2악장은 그 어둠 속에 잠시 피어난 꽃 같다. 프란츠 리스트는 이를 “두 개의 심연 사이에 핀 꽃”이라 불렀다. 그리고 이어지는 3악장은 폭발적인 생명력으로 전환된다. 강렬한 스타카토와 격렬한 아르페지오, 악센트가 뒤섞이며 내면의 격정이 한꺼번에 터져 나온다. 베토벤은 이 악장을 두고 “피아노의 줄을 모두 끊어버릴 듯한 악장”이라 말했다. 절망의 끝에서 솟아오른, 마지막 불꽃이었다.

‘월광’은 한 여인에게 바친 사랑의 노래에서 시작했지만, 그것은 들리지 않는 세계와 끝까지 대화하려 했던 한 작은 거인의 위대한 기록이었다. 어쩌면 베토벤은 외부 세계가 아니라 자신의 심연, 그 심장의 소리를 들었는지도 모른다. 귀가 아닌 손끝으로, 몸 전체로, 그리고 피아노의 진동 속에서 생의 박동을 들었다. 그 박동은 지금도 어딘가에서, 우리 각자의 어둠 속을 비추는 달빛처럼 울리고 있다.

지금 또 다른 거인, 롯데 자이언츠가 그 달빛 아래에서 길을 찾고 있다. 긴 정적과 좌절의 계절을 건너며,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도 묵묵히 그 리듬을, 선율을 되살리고 있다. 패배를 견디는 시간이 아니라, 환희를 준비하는 시간이다. 거인은 언제나 조용한 곳에서 심장을 단련하며 다시 일어선다. 이 시간은 밤의 끝을 뚫고 터져 나오는 봄의 함성으로, 여름의 열정으로, 가을의 승리로 바뀔 것이다. 베토벤이 들리지 않는 세상 속에서도 마지막까지 음악을 믿었던 것처럼, 거인은 다시금 어둠을 뚫고 향해 달린다. 한줄기 달빛 아래 거인의 심장은 또 한 번 힘차게 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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