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전 겨울 달리기를 시작했다. 러닝화 두 켤레와 운동복도 몇 벌 샀다. 매일 운동을 기록할 핵심 장비인 스마트워치도 구매했다. 합쳐보니 100만 원에 가까운 돈이다. “달리기도 장비빨”이라며 애써 위로했다. 그러다 얼마전 토크쇼 ‘유퀴즈’에 출연한 ‘낭만러너’ 심진석 선수를 알게 됐다. 그는 건설 현장에서 비계공으로 일한다. 그는 따로 시간을 내지 않고도 매일 수 킬로미터 출퇴근길을 달리며 훈련을 대신했다. 스마트워치 없이 자기 호흡에 집중했고 운동화 대신 무겁고 딱딱한 안전화를 신고 달렸다. 안전모를 담은 커다란 백팩을 등에 멘 채로 그는 새벽녘 도로변을 달렸다. 그렇게 그는 다수의 마라톤 대회를 석권했다.
심 선수의 평범한 시계만큼이나 그의 안전모와 안전화가 눈에 띄었다. 그는 건설 현장에서 인부들이 다니는 길인 비계를 설치하는 일을 한다.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데 건설 현장, 특히 비계공의 임금이 많아서 시작했다고 한다. 실제로 건설노동자는 임금이 높은 편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노가다’라 비하하며 회피하는 이유는 위험하고 힘들어서다. 건설 현장에서 산재는 일상이다. 산재로 목숨을 잃는 노동자의 절반가량이 건설노동자다. 올해 1분기에만 71명의 건설노동자가 일하다 죽었다.
건설노동자는 임금이 많지만 떼일 가능성이 크다. 다단계 하청구조 속에 때로는 팀장(십장)이, 때로는 그 위 업체가, 때로는 더 위의 원청이 돈을 주지 않는다. 하도 임금이 자주 떼이다 보니 근로기준법은 건설업에서만 임금지급의 연대책임을 특별히 규정하고 있지만(근로기준법 제44조의2, 3) 소용없다. 돈을 받으려면 얼마를 떼였는지 노동자가 증명해야 하고, 노동부에 신고라도 하는 날엔 건설 현장에 발딛기 어려워진다. 건설노동은 대표적인 일용직이다. 떼인 임금은 건설노동자들의 그 날치 생계비다.
이것이 끝이 아니다. 그들은 공사 현장이 끝날 때마다 실직하고, 언제 다시 취업할지 모르는 일이 반복된다. 고용이 극도로 불안하다. 그러니 ‘임금협상’ 같은 건 생각할 수도 없다. 그냥 주는대로 받아야 한다.
그런 건설 현장에도 어렵게 노동조합이 생겼다. 노동조합은 건설 현장에 그늘막 설치부터 요구했다. 노동자들이 마실 물을 담을 아이스박스와 휴식권을 주장했다. 떼인 임금을 당장 지급하라며 집회를 했고, 실직된 노동자들을 적정 임금에 채용할 것을 요구하며 파업을 했다. 건설사들은 건설노동자들의 파업과 집회의 압박에 밀려 밀린 임금을 지급했고, 그늘막을 설치해줬으며, 적정임금으로 채용했다. 건설노동자들은 비로소 사람 취급을 받게 됐다며 건설노조를 희망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2023년 윤석열 전 대통령의 ‘건폭’ 발언 이후 모든 것이 무너졌다. 건설노동자들의 희망이던 건설노조는 하루아침에 공갈, 협박을 일삼는 조폭으로 전락했다. 집회로 건설사들을 협박하고, 파업에 겁먹은 건설사로부터 부당하게 임금과 복지를 뜯어냈다는 것이다. 비뚤어진 정권의 비뚤어진 시각에서는 헌법에 나와있는 집회도, 파업도 모두 불법이고 협박이고 범죄였다. 그러니 겨울밤 추위를 이겨내고 거리에 몰려나와 대통령 탄핵을 부르짖던 시민들도, 그들의 눈에는 다중이 집회로 협박해 정부로부터 부당한 요구를 뜯어내는 걸로 보이지 않았겠는가.
2년간 휘몰아친 건폭 몰이의 광풍에 건설노조는 힘을 잃었고 건설 현장은 다시 옛날로 돌아갔다. 한여름 폭염에 그늘막 하나 요구할 수 없었다. 집회로 압박이라도 해야 해줄 것인데 건설 현장 집회로 뭔가를 요구하면 공갈과 강요죄로 구속되는 걸 모두가 목격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건설노동자들은 또다시 임금을 떼이고, 무더위에 쓰러지고, 출근해서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지난달 부산지방법원 항소심 재판부는 공갈죄로 기소되었던 건설노조 부산건설기계지부 간부 7명 모두에게 1심에 이어 전부 무죄를 선고했다. 건설노조가 사용자협의회와 체결한 2020년단체협약이 파업으로 협박하여 노조 간부들 임금을 뜯어낸 것이라는 혐의였다. 이 단체협약은 노사 간 단체교섭과 파업 끝에 체결된 것으로 다른 노사와 마찬가지로 정상적인 절차였다. 당시 부산시는 도시계획실장이 나서서 중재하고 합의를 이끌어냈다며 언론에 보도자료까지 냈다. 노사는 물론 그 누구도 불만은 있어도 범죄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런데 몇 년 뒤 갑자기 협박으로 임금을 뜯어낸 범죄라며 대대적인 압수수색이 진행되고 구속영장이 청구됐다. 그리고 2년에 걸친 재판 끝에 법원은 건설노동자들의 집회와 파업은 적법하고 정상적인 단체협약 체결이었다며 무죄를 선고한 것이다.
반갑지만 늦었다. 지난 정권이 몰아친 건폭 몰이는 노동자에게 비극이었고 국가에 부끄러운 역사로 남을 사건이다. 이제라도 노동자들의 명예가 회복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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