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면 기억력이 약해진다. 지인들의 이름도 잘 떠오르지 않는다. 책을 읽을 때 내용 파악이 잘 안되기도 한다. 혼자 잘 다니던 여행도 슬슬 부담스럽다. 간단한 암산도 쉽지 않다. 이 정도 되면 떠오르는 생각이 있다. 나, 혹시 치매 아냐?
정상과 치매 사이에 금으로 그어진 ‘국경선’은 없다. 하지만 해협 강 산맥처럼 애매한 경계는 있다. 저 바다를 건너면 다른 나라이지만 바다 한가운데서는 국경을 넘었는지 알 수 없다. 의사들은 정상 노화와 치매 사이의 희색 지대를 ‘경도인지장애(MCI)’라 부른다. 인지기능이란 한마디로 ‘머리 쓰는 일’이다. 기억하기, 주의 집중하기, 말하고 듣기, 때와 장소 알기, 사리 분별하기 등이다. 이런 기능이 약해져 일상이나 사회생활에 ‘지장’을 받으면 치매라 한다. 아직 지장이 없다면 경도(가벼운)인지기능장애다.
노화로 인한 정상적인(?) 건망증과 문제성 건망증은 어떻게 다를까. 정상적인 건망증은 기억을 ‘되살리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힌트를 주면 기억해낼 수 있다. 잊어버린 사실을 본인도 알기에 생각해내려고 애를 쓴다. 하지만 병적인(!) 건망증은 기억이 아예 저장 안 된다. 기억한 것이 없기에 힌트를 줘도 떠올릴 것이 없다. 심지어는 잊었다는 사실조차 잊는다.
병적인 건망증의 대상 콘텐츠는 ‘최근’ 기억이다. 오래전에 생긴 병이 아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요즘 일을 기억창고에 저장하지 못한다. 오래된 일은 이미 저장이 잘 되어 있으므로 기억을 되살려낸다.
정상적인(?) 건망증이 있는 노인이 치매로 진행하는 확률은 매년 1~2%(10년이면 10~20%)이지만 경도인지장애의 경우에는 그 확률이 매년 15% 정도다. 우리나라 통계를 보면 노인 인구(65세 이상) 중 치매는 9%를 차지하고, 경도인지장애는 3배 조금 못 되는 28% 정도다. 지금 대략 300만 명이 경도인지장애 상태이다. 아직은 환자로 볼 수 없지만 6년이 지나면 그들 중 십중팔구가 치매로 진행한다.
이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치매 환자가 늘 것이고 고령화 사회의 큰 부담이 될 것이라서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 상태에서 어떤 노력을 하는가에 따라 치매를 예방하거나, 적어도 발병을 늦출 수 있는 사람이 많기에 매우 중요하다.
당뇨병을 예로 보자. 건강검진에서 피 검사를 해보니 공복 혈당은 괜찮은데 식후 혈당이 높고 당화 혈색소가 정상 범위보다 높다는 결과가 나왔다. 일상생활에 아무 지장이 없지만 일단 당뇨병 ‘예비’ 단계인 셈이다. 연간 2.5%의 확률로 당뇨병으로 진행할 것이기에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당장 단 것을 줄이고 운동을 하고 살을 빼고 식사 조절을 시작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해서 당뇨병을 예방하거나 적어도 발병을 지연시키려고 노력한다.
경도인지장애도 마찬가지다. 치매로 진행하는 확률은 당뇨 전 단계에서 당뇨병으로 가는 확률보다 무려 6배나 높다. 가만둬서 되겠는가. 바로 관리를 시작해야 한다. 회색 지대에서 어두운 흑색 지대로 갈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밝은 쪽으로 나와야 한다. 제대로 된 노력을 빨리 시작할수록 효과가 크다. 그래서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 어쩌면 치매보다 이 진단을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하나만 해야 한다면, 바로 운동이다. 지난봄에 보건의료연구원(NECA)이 경도인지장애 임상진료지침을 내놓았다. 홈페이지에 가면 누구든 볼 수 있는 지침에는 여러 방법에 대한 평가와 권고사항이 붙어 있다. 우리 국민의 사랑을 받는 뇌 영양제 대부분은 ‘평가 유보’이며 일부 뇌 기능 개선제는 B등급을 받았다. 상황 봐서 써볼 수도 있지만 인지 기능 개선 효과가 있다는 증거는 불충분하다는 뜻이다.
그동안 국민의 과분한 사랑을 받았고 병의원에서도 쉽게 처방받아 보험 약값만 내면 먹을 수 있었던 ‘뇌 영양제’는 지난가을부터 경도인지장애나 정상인이라면 보험 혜택이 줄었다(단, 치매는 보험 적용을 받는다). 하지만 좋은 소식도 하나 있다. 지침에서도 유일하게 A등급을 받은 항목이 있다. 처방을 강력히 권하라는 말이다. 바로 운동이다. 뇌 영양제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치매 치료제(모두 B등급)보다 경도인지장애 상태에 더 도움이 된다.
운동을 하면 뇌의 신경세포(뉴런)가 재생하며 시냅스도 늘어날 뿐만 아니라 뇌혈관도 새로 생긴다. 우리 세포 내 에너지 공장인 미토콘드리아도 새로 생긴다. 항염증물질과 항산화물질이 생기고 대사 기능도 심폐 기능도 좋아진다.
뇌에 좋은 운동이지만 아울러 당뇨병 고혈압 저혈압 고지혈증 비만에도 도움이 된다. 골다공증은 물론이고 근감소증도 예방한다. 운동을 하면 잠도 잘 오고 우울한 기분도 좋아진다. 파킨슨병 같은 뇌의 퇴행성 질환에도 신경과 의사들은 운동을 권유한다. 운동의 효과는 일석삼조가 아니라 일석십조, 일석백조에 가깝다. 이 정도면 경도인지장애 상태이든, 아니든 못 할 이유가 뭔가. 이제 효용성을 잃은 뇌 영양제에 대한 지독한 편애를 버리자. 그리고 운동을 하자. 매일 30분 빨리 걷기부터 시작하자. ‘귀차니즘’을 뿌리치고 힘들게 디딘 그 한 걸음이 나의 뇌를 건강하게 만드는 위대한 첫걸음이 된다. 새해에 바로 시작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