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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호의 와인 한 잔] 존재의 가벼움, 그리고 한 잔의 와인

최태호 부산가톨릭대 와인전문가과정 책임교수

  • 최태호 부산가톨릭대 와인전문가과정 책임교수
  •  |   입력 : 2026-04-19 18:38:18
  •  |   본지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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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에트루리아의 성벽과 중세 건축물이 잘 보존된 이탈리아 움부리아의 주도(주를 대표하는 도시) 페루자.
커피와 와인은 서로 다른 시간을 닮은 음료다. 커피가 아침의 시작이라면 와인은 하루의 끝에 찾아오는 이야기다. 그래서 어떤 사랑은 커피로 시작해 와인으로 완성되기도 한다. 와인은 기다림의 음료다. 포도 한 송이가 시간이 지나며 더 깊은 맛으로 만들어지듯 사랑도 그렇게 숙성된다. 함께 웃었던 기억, 다시 화해했던 순간들, 말없이 같은 풍경을 바라보던 저녁들. 그 모든 시간이 와인처럼 서로의 관계를 조금씩 깊게 만들어 간다.

사랑에는 향기가 있다. 어떤 사랑은 커피처럼 시작된다. 따뜻하고 조금은 쌉쌀하지만, 마음을 깨우는 향기처럼.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와인처럼 변한다. 깊어지고, 부드러워지고, 오래 남는 향기처럼.

밀란 쿤데라는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인간의 삶을 ‘가벼움’과 ‘무거움’이라는 두 개의 축 위에 올려놓았다. 한 번뿐인 인생은 반복되지 않는다. 그래서 삶은 깃털처럼 가볍고 때로는 허무하게 느껴져 견디기 어렵다는 역설. ‘가벼움이 좋은가? 무거움이 좋은가?’ 책장을 덮은 뒤에도 오래 여운이 남는 이 철학적 물음은 이상하게도 한 잔의 와인을 마신 후의 여운과 닮아있다.

와인은 순간의 예술이다. 병 속에서 수십 년을 잠들어 있다가도 코르크가 열리는 순간 모든 시간은 현재로 흘러 들어온다. 향은 피어오르고 맛은 입안에서 사라진다. 다시는 동일한 순간으로 돌아갈 수 없다. 바로 그 점에서 와인은 쿤데라가 말한 ‘가벼움’의 감각을 닮아있다. 되풀이되지 않는 경험, 붙잡을 수 없는 찰나.

그러나 흥미롭게도 우리는 그 가벼운 순간에 ‘의미’를 부여하려 한다. 좋은 와인을 고르고, 어울리는 사람과 나누고, 특정한 날을 기억한다. 그렇게 한 잔의 와인은 점점 ‘무거움’을 획득한다. 결혼식의 샴페인, 오랜 친구와의 재회에서 마신 한 병의 바롤로. 와인은 단순한 액체가 아니라 기억의 매개가 된다. 얼마 전 돌아가신 아버지와의 마지막 이별의 잔이 되어버린 부르고뉴 한잔. 함께했던 시간, 남겨진 말들, 다시 돌아오지 않을 순간들이 삶의 무게로 남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무게 덕분에 기억은 진하게 남는다.

쿤데라의 세계에서 가벼움은 자유이지만 동시에 공허에 가깝다. 반대로 무거움은 책임이자 의미이며, 때로는 삶을 붙드는 중력이다. 와인도 마찬가지다. 아무 의미 없이 마시는 한 잔은 가볍게 스쳐 지나간다. 그러나 어떤 이야기를 담은 와인은 그 순간을 오래 붙잡는다. 결국 우리는 가벼움 속에서 무거움을 찾고, 무거움 속에서 다시 가벼움을 갈망한다.

와인을 마신다는 행위는 어쩌면 그 두 세계를 오가는 일이다. 잔을 들어 올리는 순간, 우리는 지금 순간의 가벼움에 몸을 맡긴다. 그러나 동시에, 그 향과 맛은 과거와 사람, 감정들을 불러오며 삶에 무게를 더한다.

그래서일까. 훌륭한 와인은 단순히 맛있는 술이 아니라 존재를 잠시 사유하게 만드는 장치이다. 한 모금 삼키는 사이, 우리는 묻게 된다. 이 순간은 얼마나 가벼운가, 그리고 얼마나 무거운가.

어쩌면 인생은 거대한 한 병의 와인과 같다. 언젠가 반드시 비워질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그 안에서 의미를 찾고 기억을 채워 넣는다. 그리고 마지막 잔을 마신 뒤에야 깨닫는다. 그 모든 가벼운 순간들이 모여 결국 하나의 무게 있는 삶이 되었다는 것을. 어떤 사랑은 커피로 시작하지만 어떤 사랑은 와인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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