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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프라노 플로렌스 포스터 젠킨스. |
테리빌리타(Terribilita)는 화가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평할 때 주로 사용되는 용어로서 숭고함이나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대작에서 느끼는 감정을 뜻하는 말이다. ‘최후의 심판’ 같은 작품이 대표적이다. 실제 교황 율리우스 2세는 당시 미켈란젤로를 보고 ‘무시무시한 사람’이라고 했다. 그의 작품에서 인간의 한계를 넘는 초월적인 무엇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 음악에서의 테리빌리타는 어떤 것일까? 보통 교향곡의 최절정 부분에서 그런 장엄미나 전율을 느낄 수가 있다. 관현악은 최대의 음량과 다양한 음색 등 복합적인 구조 등으로 해서 그 감동의 폭이 다른 장르에 비해 당연히 압도적이다. 정교하게 설계된 패턴, 긴장과 이완으로부터 나오는 클라이맥스들의 중첩은 마침내 광휘를 내뿜으며 테리빌리타를 만들어낸다. 바로크부터 본격적인 관현악의 규모는 점점 확대되고 작곡가들은 관현악의 표현력에 주력하게 된다. 베토벤은 합창교향곡에서 그 환희와 극적인 표현을 위해 교향곡에 사람의 목소리까지 도입하는 파격적인 시도를 한다.
후기 낭만에 와서는 관현악의 규모는 상상을 초월한다. 말러의 교향곡 8번은 초연 당시 1000명이 넘는 연주자가 동원되어 ‘천인 교향곡’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현대에 와서도 수천 명이 부르는 연합합창단, 수백 명의 연합 오케스트라 등을 자주 볼 수 있다. 기타리스트이자 작곡가인 글렌 브랑카는 기타 100대를 위한 특이한 편성의 교향곡을 작곡하기도 했다. 음향은 물론 무대의 악기만 봐도 장관이다. 음악은 이렇게 점점 더 거대함을 추구한다.
그러면 독주곡이나 실내악에서의 테리빌리타는 어떨까? 무반주 바이올린 독주곡인 바흐의 샤콘느는 종교적인 경외심을 불러일으킨다. 베토벤의 현악사중주 ‘대푸가’ 같은 곡은 치열한 대위법의 궁극적인 구현을 보여준다. 이 곡은 마치 씨줄과 날줄이 얽히면서 온갖 무늬와 형상을 만들어내는 거대한 양탄자 같은 직조물을 연상하게 한다. 이런 실내악은 관현악과 또 다른 정제된 품격이 있다. 테리빌리타는 꼭 큰 편성이 아닌 제한된 편성에서도 때론 더욱더 부각되기도 한다.
플로렌스 포스터 젠킨스라는 미국의 소프라노가 있었다. 그녀는 사실 음치에 가깝지만, 다른 사람이 자기를 알아보지 못할 뿐 스스로 자기는 훌륭한 성악가라고 믿고 있다. 음반도 내고 독창회도 가졌다. 그녀는 마침내 1944년 76세에 카네기 홀에서 마지막 독창회를 가진다. 표는 매진이었다. 이 얘기는 메릴 스트립이 주연을 맡아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특히 그녀가 부르는 모차르트의 ‘밤의 여왕 아리아’는 압권이다. 처음에 들을 땐 나도 실소가 나왔다. 그러나 곧 그 진지함에 어느새 웃음이 멈추고 그 노래에 동조되어 가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열정과 진지함에 내가 가졌던 음악적 상식이 다 허물어졌다. 그녀는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진정으로 음악을 사랑하는 성악가였다. 실제 그녀는 토스카니니를 비롯해 많은 음악인을 후원하기도 했다.
우리는 늘 최고의 연주자, 최상의 음악회만을 찾는다. 음악의 소비 형태가 그렇다. 그러나 어느 촌로가 읊는 민요 한 자락이나 저 대륙의 광활한 초원에서 들리는 유목민의 오르틴 도가 콘서트홀의 음악회보다 때론 더 폐부를 찌르는 것은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모든 음악에는 자기만의 이야기와 감동이 있다. 최상 최고 최대의 것만을 찾는 것도 큰 만족감을 주겠지만 어떤 음악이든 우리가 진정으로 그것에 교감하고 감동할 때 그것이 진정한 테리빌리타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