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겨울, 두 번의 여행을 했다. 중국 윈난성과 일본 열도 종주였다. 두 여정 모두 보름 남짓한 일정에 적지 않은 비용을 들였지만, 돌아온 뒤 내 안에 남은 풍경의 농도는 판이했다. 한 여행은 지금도 그곳의 저녁 공기가 만져질 듯 선명한데, 다른 여행은 낡은 영수증처럼 희미하다. 대체 무엇이 이 차이를 만든 걸까. 되짚어보니 여행의 밀도는 ‘얼마나 멀리 갔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머물렀는가’에 있었다.
윈난성에서의 시간은 느슨하고도 다정했다. 쿤밍에서 리장, 샹그릴라로 이어지는 길 위에서 나는 철저히 혼자였고 자유였다. 숙식은 함께하되 낮시간은 각자의 몫이어서 아침이면 오로지 나만의 지도가 펼쳐졌다. 궁금증이 이는 방문지 몇 곳을 지도에 찍어놓고 택시를 부르거나 낯선 마을을 발길 닿는 대로 돌며 골목 체험을 하곤 했다.
무엇보다 좋았던 건 숙소의 입지였다. 리장 고성의 물레방아 소리가 들리는 곳, 샹그릴라 두커종 고성의 월광광장이 손에 잡히는 곳. 윈난성 여행에서는 숙소 문만 나서면 곧장 그 도시의 심장부로 걸어 들어갈 수 있었다. 이방인의 시선으로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그곳 사람들의 생활에 은근슬쩍 들어가 살아보는 기분. 이름 없는 작은 가게의 차 맛과 소수민족 마을의 저물녘 풍경은 그렇게 내 안으로 들어와 한 편의 소설이 되었다. 여행이 단순한 소비를 넘어, 내 삶의 문장으로 치환되는 시간이었다.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샹그릴라의 저녁이었다. 저녁을 먹고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티베트 장족 사람들이 음악에 맞춰 천천히 원을 그리며 춤을 추고 있었다. 관광객도, 아이도, 노인도 그 원 안에 자연스럽게 섞였다. 나는 한동안 그 원 바깥에 서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그들과 발을 맞추고 있었다. 여행이라는 것은 그렇게 원의 바깥에 서 있다가 잠시 안으로 들어가 보는 일인지도 모른다.
한 달 뒤, 후쿠오카에서 홋카이도까지 신칸센으로 가로질렀던 일본 여행은 윈난성보다 훨씬 비쌌지만, 만족도는 놀라울 만큼 낮았다. 범인은 역설적이게도 ‘편리함’이었다. 모든 숙소가 신칸센 역 바로 옆이었다. 도시에서 도시로 이동하기엔 더없이 효율적이었으나 그 도시에서 정작 가고 싶었던 곳은 갈 수가 없었다. 일정에 들어있었던 도쿄는 환승차 내린 역 앞에서 인증샷 찍는 것으로 체크만 했고, 카가와현 역시 들르기는 했지만 쿠사마 야요이의 ‘노란 호박’이 있는 나오시마섬은 구경도 못했다. 주마간산의 연속이었다.
신칸센은 정확했고, 우리는 실수 없이 도시를 옮겨 다녔다. 그런데 그 정확함 속에서 여행은 점점 밋밋해지고 흐려졌다. 도착은 쉬웠지만 머무름은 없었다. 창밖의 풍경은 속도에 눌려 납작한 이미지로 지나갔고, 그 속의 사람들 역시 풍경처럼 스쳐 갔다. 여행은 계속되고 있었는데, 내 마음은 아직 출발도 못한 기분이었다.
인솔방식의 차이도 컸다. 윈난성에서는 알짜배기 정보를 담은 안내서를 주어 그날그날 일정을 짤 수 있었지만, 일본에선 그런 배려가 없었다. 종주 여행의 묘미를 살린 설계와 현지에서 필요한 조언을 기대하며 인솔비를 지불했지만 내 손에 남은 건 기차표와 비좁은 호텔키뿐이었다.
두 여행을 연달아 겪고 나서 한 가지는 분명해졌다. 여행에서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시선’이라는 것. 사람은 장소가 아닌, 그 장소에서의 자신을 기억하는 거라는 것. 그랬기에 윈난성 여행에서 돌아온 뒤 오래도록 그 장면들을 놓지 못했다. 그것들이 언어가 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여행이 끝났는데도 무언가가 계속 익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일본 여행은 오래 붙들고 있을 장면을 남기지 못했다. 여행은 했는데, 아무 데도 닿지 않은 것이다.
다음에 다시 짐을 싼다면, 나는 화려한 영수증을 챙기는 일정보다 내 안의 문장이 천천히 발효되는 시간을 택할 것이다. 서두르지 않아도 되는 여행, 길을 잃어도 괜찮은 여행을. 그리고 아마 또 어느 광장 어귀에 서 있을 것이다. 원 바깥에서 한동안 바라보다가, 어느 순간 발을 맞추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