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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 칼럼] 관계 자산, 情

세계 휩쓰는 K-문화에 밀도높은 관계문화 자리

개인 중시 흐름 속에서 특유의 ‘정’ 의미 새겨야

김종천 영파의료재단 이사장·부산가톨릭대학교 특임교수

  • 김종천 영파의료재단 이사장·부산가톨릭대학교 특임교수
  •  |   입력 : 2026-05-19 19:30:15
  •  |   본지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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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세계가 한국 문화에 열광하는 이유가 K-팝과 드라마, 화장품 등에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느 스웨덴 유튜버는 “세계가 한국 문화에 열광하는 이유를 단순히 K-팝과 드라마, 화장품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한국의 문화를 너무 얕게 보는 것이다”고 지적한다. 외국인들이 한국 문화를 좋아하는 이유에는 최빈국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추진력 있게 살아가는 한국 모습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이 우리 문화에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과거 약자였던 대한민국이 오늘날 성공해서가 아니라 결과를 만들어낸 ‘그 힘’을 부러워한다는 것이다. 단순히 K-팝의 멜로디가 아닌 음악에 담겨있는 문화를 좋아하고 있다는 날카로운 지적을 보면서 우리가 못 느끼는 그 무엇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특히 서구 선진국에서 우리 문화에 열광하는 이유는 자기 나라는 이미 잃어버린 것이 한국 문화에는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서양은 일찍 독립하여 개인적인 삶과 자유를 누리는 데 익숙하지만 관계에서 비롯되는 감정은 상대적으로 얕고 약할 수밖에 없다. 그들이 한국 드라마를 통해 가족 식사 자리에서 할머니가 손주를 챙기고, 아버지는 대화를 듣고, 어머니는 음식을 채워주는 모습을 보면서 서양의 문화에서는 느끼지 못한 것을 느낀다는 것이다. 그들이 이미 잃어버린 그것을 말이다. 밀도 높은 가족 관계를 비롯한 관계 문화가 때로는 피곤할 수도 있지만, 그 문화에 담긴 끈끈한 정과 인간미는 서양이 따라 한다고 따라할 수도, 베낄 수도 없다.

미국 유학시절 몇 명의 교수가 나에게 질문한 것이 갑자기 떠오른다. 한국 유학생들은 유난히 함께 모여서 식사를 하는 광경이 많은데 특별한 이유가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당시 나의 짧은 생각으로는 혼밥을 하는 것보다는 여럿이 함께 식사하는 것이 덜 외롭지 않겠느냐는 어설픈 답변을 했다. 지금 와 돌이켜 보면 우리에게는 무의식적으로 관계 문화가 몸에 배어 식사만 하더라도 함께 먹는다는 건 단순한 영양 섭취를 넘어 서로의 정을 쌓는 따뜻한 일로 밥 정(情)이 중요시 되어왔던 것 같다.

아마 프랑스 파리 에펠탑에서 기념품을 파는 세네갈 출신‘파코’를 아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초면인 이에게도 통성명을 하고 상대에게 관심을 갖는 우리의 무의식적인 본능이 아마 관계에서 비롯되는 정(情)이 아닐까 싶다. 정에 매료되어 한국인 전담 상인이 되었다고 하는 파코는 한국 여행객에게 사진을 열정적으로 찍어주거나 덤을 주는 등 K-정(情)을 실천하고 있다. 대한민국 국민 정서인 ‘정(情)’이 가진 절대적인 힘을 보여주는 사례다.

오늘 우리는 건국 이후 지난 80여 년 동안 전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격변의 시기를 보냈다. 그 격동의 소용돌이 한복판에서 가장 극적인 변화를 겪은 단위는 아마도 ‘가족’일 것이다. 생존을 위해 함께 뭉쳤던 대단위 가족 공동체는 이제 가족 구성원 각자의 단위로 자발적 분리의 형태로 변해가고 있다. 1997년 외환위기는 ‘가족이 나를 지켜줄 것’이라는 신뢰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 이에 이혼율도 급증하고 황혼이혼의 비중이 신혼이혼을 추월한지 이미 꽤 되었다. 저출산 고령화 현상이 본격화되면서 가족 구성원의 수는 급격히 줄 뿐만 아니라 각자 도생의 길을 선택하는 방향으로 변해갔다. 그로 인해 가족은 더 이상 절대적인 안식처가 아닌 ‘선택’과 ‘관리’의 대상이 되었다.

지금 우리 사회의 가족은 더 이상 하나의 단어로 정의될 수 없는 듯하다. 기성세대가 알던 ‘정상 가족’이라는 직계가족과 핵가족의 개념 자체가 더 이상 설득력을 잃어버린 것이다. 1인 가구가 전체 가구의 36%를 넘어 전통적인 가족 부양의 의미는 공적 부조의 영역으로 넘어갔고 정서적 유대감만이 가족의 유일하고도 가장 강력한 기능으로 남아있게 된 셈이다. 가족을 비롯한 우리의 관계 문화가 세계의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 쉽게 따라 할 수도 없다고 어느 외국인이 표현하지만 우리 문화도 서서히 서양처럼 개인의 자율성과 다양성을 존중하는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은 현실이다.

관계 문화는 상호 존중과 배려, 경청, 신뢰를 기반으로 타인과 유대감을 형성하는 사회적 상호작용 방식이다. 특히 우리 사회에서는 식사 등을 통해 친밀감을 나누는 가족 같은 관계를 중시하며 이는 정과 오지랖 등 정서적 유대감으로 발현된 듯하다. 귀찮을 만큼 오지랖 넓게 챙기는 문화가 때로는 피곤할 수도 있지만 우리만의 밀도 높은 특유한 관계 문화가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끔 한 자산인 것이다. 우리 문화의 진짜 힘은 유행과 멋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서로의 관계(정)에서 나온 것이다. 어느 나라도 쉽게 따라 할 수 없는 우리의 관계 문화가 아직 우리에게 남아 있는 소중한 자산임을 깨닫을 때 앞으로 이를 지키고 어떻게 더 발전시킬 수 있는지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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