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긋한 휴일 오후,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다 ‘다정한 노부부가 타고 있어요’라는 제목에 끌려 고정한다. 휴먼 다큐 프로그램인데 재방송이다. 배경은 전남 화순의 한 농촌 마을. 아침은 늘 비슷하게 시작된다. 팔십 대인 할아버지는 밭에 나가기 전 먼저 차 앞으로 간다. 물걸레로 먼지를 닦고 타이어를 한번 둘러본다. 그런 뒤에 시동을 건다. 평범한 소형 중고차지만 그에게는 남다르다. 환갑이 넘어 세 번 만에 어렵게 딴 운전면허, 그리고 그 면허로 처음 얻은 자유가 그 차 안에 있다. 경운기 대신 차를 몰고 밭에 다닌 지도 어느덧 20년이 훌쩍 넘었다.
아내는 늘 불안하다. 몇 해 전 큰 사고를 겪은 뒤부터다. 이제는 운전을 그만하고 차를 팔라고, 아내는 틈날 때마다 남편을 다그친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좀처럼 운전대를 놓지 못한다. 차는 밭으로 함께 가는 길 친구이고, 일손 놓지 못하는 아내를 태우고 다녀야 하는 이동수단이기 때문이다. 운전을 그만두면 왠지 삶이 더 쪼그라들 것 같다. 그런 마음을 몰라주는 것 같아 속이 상한다.
며칠을 고민하던 할아버지는 끝내 묘안을 떠올렸다. “다정한 노부부가 타고 있어요” 종이 달력을 찢어 하얀 뒷면에 삐뚤지만 정성껏 글씨를 적었다. 할머니는 어이없어하다가도 이내 웃고 만다. 할아버지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간다. “이렇게 써놓으면 뒤에서 받지 못할 거야.” 할머니는 이게 마지막이라는 것을 안다. 나는 이 문구 속 ‘다정한’이라는 형용사에서 아내에 대한 사랑을 읽는다.
요즘 노인 운전에 대한 이야기는 대부분 부정적으로 시작된다. 사고 뉴스가 나오면 고령 운전자 전체가 위험한 존재로 묶인다. 느린 차는 민폐가 되고, 굼뜬 움직임은 비난의 대상이 된다. 그런데 도로 위를 위태롭게 만드는 것은 과연 느린 운전일까. 조급함과 분노는 어떤가. 누군가의 속도를 견디지 못하고 경적부터 울리는 마음, 끼어든 차를 끝내 추월해 다시 앞으로 파고드는 태도 같은 것들 말이다.
자동차 뒷유리창에 붙이는 스티커의 유래는 우리에게 익숙한 “아기가 타고 있어요”라는 문구다. 1984년 미국의 사업가인 마이클 러너는 어느 날 어린 조카를 태우고 운전하다가 주변 차들의 거친 운전과 경적 소리에 크나큰 불안감을 느꼈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좀 더 차분히 운전할 수 있을까. 고심하던 그에게 독일에서 건너온 한 부부가 영감을 주었다. 그 부부는 독일과 유럽에서 유행하던 안전운전 표지판을 미국에 도입하려 했고, 마이클 러너는 이 아이디어를 사서 ‘세이프티 퍼스트(Safety 1st)’라는 회사를 설립한다. 그렇게 탄생한 노란색 마름모 사인 ‘아기가 타고 있어요(Baby On Board)’ 스티커는 빠르게 퍼져나가 하나의 문화적 현상으로 자리 잡았다.
이제 너무나 익숙해진 이 문구는 더 이상 배려의 메시지로 읽히지 않는다. 대신 “까칠한 아기가 타고 있어요!” “나도 내가 무서워요!” 같은 경고와 농담 사이의 문장들이 그 자리를 채워 갔다. 재미 삼아 붙이는 경우도 있겠지만, “시비 털지 말고 지나가자” “짐승이 타고 있어요” 같은 문구에 이르면 눈살을 찌푸리게 된다. 적대감은 유머의 외피를 두르고 똬리를 튼다.
“다정한 노부부가 타고 있어요” 여기에는 어떤 위협도, 변명도 없다. 다만 늙어가는 두 사람이 세상을 향해 건네는 조용한 부탁이 담겨 있다. “우리가 조금 느릴 수 있어요. 그러니 너무 미워하지는 말아 주세요.” 이 문구를 보게 된다면 경적에 올라가던 손도 잠시 멈칫할 것이다. 문득 ‘다정한’ 누군가의 얼굴이 떠오를 것만 같다.
운전을 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거리의 현수막을 읽게 된다. 푸른 하늘, 살랑이는 바람만으로 행복해야 할 계절에 나부끼는 혐오의 언어는 깊은 한숨을 불러온다. 언어는 감수성 이전에 사유에서 비롯된다. 어쩌면 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 가운데, 가장 먼저 사라진 것은 다정함이었는지도 모른다.
“다정한 사람이 타고 있어요” 이런 스티커는 어떨까. 그러면 1센티미터라도 더 다정함에 가까워질 수 있을 테니까. 나에게, 그리고 타인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