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9년 2월, 파리의 어느 선술집에서 학생 몇 명이 술값을 놓고 옥신각신하다 주인에게 두들겨 맞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튿날 격분한 학생들이 몰려가 술집을 부수자, 대학을 길들일 구실을 찾던 당시 파리 섭정 왕비는 즉각 군대를 보내 응징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과정에서 목숨을 잃는 학생이 생긴다. 3월 27일, 파리대학은 이에 항의하며 전면 파업에 돌입했다. 교수들은 강의를 멈추고, 학생들은 오를레앙으로, 랭스로, 심지어 이탈리아로 뿔뿔이 흩어졌다. 역사는 이 사건을 ‘대분산(the Great Dispersion)’이라 부른다. 이 파업은 2년이 지나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가 교서 ‘학문의 어버이(Parens scientiarum)’를 반포하며 비로소 끝난다. 교황이 파리 주교에게 세속 권력에 맞서 대학을 보호하라고 촉구하면서, 대학은 고유한 자율권을 법적으로 보장받게 되었다. 흔히 ‘학문의 자유(libertas scholastica)’라고 불리는 대학의 자유가 확립되는 과정이다.
대학의 파업이라니, 이 무슨 해괴한 소리인가. 본래 대학이 대장장이나 제빵사 길드처럼, 가르치고 배우는 학인들의 길드 즉 조합을 의미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그리 이상한 소리만은 아니다. 주로 도시의 이방인이었던 교수와 학생들은 토착민과 이해가 상충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들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권익을 지키기 위한 자발적 결사체를 만들었다. 대학(universitas)이라고 불리는 이 조합은, 구성원의 경범죄에 대한 자체 재판권이나 집세와 물가에 대한 상한을 지역민들에게 요구했다. 지역민들로서는 특권을 요구하는 대학 조합이 못마땅했지만 그들의 거주는 도시경제의 필수 요소였으므로, 교수의 종신 주거 의무를 강요하는 등의 방식으로 맞대응을 찾았다. 대학의 파업과 철수는 지역민들에게 큰 위협이었으니, 중세 대학과 지역은 불가근불가원의 관계에 있었다 하겠다.
최근 몇 년, 한국의 대학정책은 지역에 대한 대학의 밀착과 공헌을 강조하는 듯하다. 거점 국립대 3곳만 경쟁 선발하겠다고 최근 말을 바꿨지만, 서울대라고 불리는 ‘욕망의 모호한 대상’을 10개나 복제하겠다는 구상이 애초 나온 이유 또한 지역 균형 발전이라는 일말의 선의와 무관하지 않았다. 인재를 남겨 지방을 발전시키겠다는 문제의식은 매우 중요하다. 지방 소멸이 말뿐 아니라 현실이 되어 가는 마당에, 어떻게든 문제를 풀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분명히 해둘 게 있다. 지역에서 인재를 길러내는 것은 대학의 책임일 수 있지만, 그 인재가 지역에 정주하는 것은 대학의 역할을 넘어선다. 양질의 일자리와 문화·의료·주거 인프라가 취약한 곳이라면 아무리 훌륭한 대학을 갖다 놔도 졸업생은 짐을 싸 서울행 기차에 오른다. 청년이 지방을 등지는 것은 지방 대학의 교육이 부실해서가 아니다. 정주의 문제는 대학정책이 아니라 고용정책, 주거정책, 문화정책, 지역 산업정책으로 풀 문제다.
국가와 사회가 져야 할 책임을 대학에 슬쩍 떠넘기는 정책에는 오랜 역사가 있다. 재정 지원을 무기로 ‘창조경제를 견인하는 융복합 교육’ ‘기업이 원하는 실무인력 배출’을 외치며 대학들을 닦달했던 박근혜 시대의 전례만 생각해봐도 된다. 청년 실업이 심각하면 ‘기업 맞춤형 인재’를 길러내라, 인구가 줄면 ‘지역 정주 인재’를 길러내라 한다. 윤석열 정부가 출범시켜 지금도 계속되는 라이즈 사업과 글로컬 사업의 본질이 정확히 이렇다.
정작 문제의 핵심은 십수 년간 외피만 바꾸며 지속되어 온 교육부의 땜질식 대학정책이 아니라, 그것을 대하는 대학의 태도다. 재정에만 도움이 된다면 대학은 좌우로 나란히 정렬하여 어떤 구호든 외칠 준비가 되어있다. 마치 해바라기처럼, 정부를 향해서는 “재정 지원을 해주면 지역 정주형 글로컬 인재를 배출합니다”고, 학생에게는 “우리 대학에 오면 취업을 책임집니다”고 외친다. 고용 없는 성장의 시대, 강고한 지역 격차의 원인을 직시하려는 의지는 없이, 그럴듯한 헛소리를 자신 있게 내뱉는 AI를 연상시키지 않는가. 어떻게 하면 QS 대학 순위에 오를까 노심초사하면서, 보고서가 강의록을 대신하고, 수치가 학문을 대체하며, 컨설팅사가 총장실을 드나든 지 오래다. 기초학문과 교양교육은 이미 초토화되었고 시간강사 후려치기는 여전한데, 대형 강의는 갈수록 늘어난다. 이도 자율성이라면 자율성이겠다.
다만, 정부 재정 지원에 목매다는 교육기업의 성실한 자율성은 800년 전 파업을 불사하며 중세 대학인들이 패기로 벼려낸 학문의 자유와는 너무나 다르다. 1229년 파리의 학생과 교수들은 자신들의 존재 가치를 지키기 위해 도시를 떠났다. 2026년 한국 대학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입증하기 위해 업체의 평가 기준에 자신을 끊임없이 끼워 맞춘다. 800년의 시차를 가진 두 풍경 사이에서 한 번쯤은 물어야 하지 않을까. 대학이란 무엇인가. 지역에서 대학이란 도대체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