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장마는 예년보다 늦게 시작됐다. 장마를 기다리는 동안 비 소식은 좀처럼 들리지 않았고, 강수 예보도 며칠 사이 여러 번 바뀌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예보를 다시 확인하는 일이 이제는 낯설지 않다. 변화의 방향을 정확히 예측하기보다 끊임없이 변하는 상황에 대응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불확실성은 인간만의 경험이 아니다. 생명은 언제나 예측하기 어려운 환경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자신만의 전략을 만들어 왔다. 환경이 안정적일 때 생명은 서두르지 않는다. 충분한 시간 동안 성장하고 몸을 단단히 만들며 오래 살아갈 전략을 택한다. 반대로 환경이 불안정해지면 상황은 달라진다. 언제 먹이를 잃을지, 언제 포식자를 만날지 모르는 상황에서는 미래를 기다리기보다 현재에 집중하는 편이 유리하다. 그래서 더 빨리 자라고 더 빨리 번식한다. 생물학에서는 이를 ‘트레이드 오프(trade-off)’라고 부르는데, 특정 방향으로의 이득은 다른 방향의 손실을 동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컨대 먹이 경쟁이 심하거나 환경 변화가 큰 곳의 물고기들은 안정적인 환경의 개체보다 훨씬 빠르게 성장하지만, 그만큼 일찍 늙고 수명도 짧다.
오늘날 우리는 유달리 빨라진 성장의 시대에 놓여 있다. 어린 나이에 진로를 결정해야 하고, 전문성을 더 빨리 요구받으며, 성과 또한 더 이른 시기에 기대된다. 기술의 발전은 이러한 속도를 가능하게 만들었고, 사회는 그 속도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변화를 생물학은 어떻게 설명할까.
생물학의 언어로 번역하면, 생명은 지금의 환경을 점점 더 불안정한 환경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실제로 심리학과 신경생물학 연구는 높은 스트레스와 불확실성 속에서 자란 아이들이 평균보다 이른 신체 성숙을 경험하는 경향이 있음을 보여준다. ‘조기 성숙’이라고 불리는 이 현상은 더 건강한 성장의 결과라기보다, 불안정한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발달의 속도를 앞당긴 결과로 이해된다. 다시 말해, 빠른 성장은 생명의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 처한 환경을 드러내는 신호인 것이다.
우리는 모두 성장의 시계를 가지고 살아간다. 그 속도는 개인의 능력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과 사회가 어떤 속도를 요구하는지에 따라 성장의 시계는 더 빨라지기도 하고, 천천히 흘러가기도 한다. 생물학적으로도 이러한 시간 구조는 전혀 낯선 것이 아니다. 어떤 변화에는 즉각적으로 반응하고, 어떤 변화에는 서서히 적응하며, 또 어떤 변화에는 긴 시간을 두고 형태를 바꾼다. 중요한 것은 이 시간들이 서로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흐름 안에서 동시에 작동한다는 점이다. 빠른 적응도 필요하지만, 유난히 느린 성장의 시간과 충분한 휴식 역시 중요하다.
그런데 이 균형이 점점 한쪽으로 기울어지고 있다. 성장의 시계가 빠른 속도만을 향해 맞춰지고 있는 것이다. 성장의 속도에 민감해질수록 충분히 쌓여야 할 시간은 압축되고, 방향을 탐색해야 할 시간은 생략되며, 순간에 반응하는 시간의 비중만 커진다. 환경이 요구하는 속도에 맞추려 할수록 우리는 빠른 성장만을 합리적인 선택으로 여길 수 있다. 그 결과 우리는 성장의 깊이보다 속도에 먼저 반응하도록 길들여질지도 모른다.
생명은 언제나 빠른 방향만을 선택해 온 것은 아니다. 때로는 멈추고, 기다리고, 축적하는 시간을 통해 변화에 대응하고 더 오래 지속될 수 있었다. 불확실한 시대에 필요한 것은 변화 속에서도 자신의 방향을 조정하며 나아갈 수 있는 힘이다. 빠른 성장이 요구되는 시대를 살아가는 지금, 우리가 다시 맞춰야 할 것은 성장의 속도가 아니라 성장의 시계일 것이다.
모든 생명이 저마다의 시간을 가지고 살아가듯 인간에게도 각자의 시간이 있다. 서두르지 않아도 충분히 성장할 수 있는 환경, 각자의 시간이 존중받는 사회가 필요하다. 결국 성장을 결정하는 것은 속도가 아니라 환경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다시 기억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