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의 소리’ 칼럼과 어울리지 않지만, ‘청년’이 상호에 들어간 가게가 꺼려진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 있나요? 초창기엔 열정과 가성비, 혁신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지만, 요즘은 모자란 전문성과 미숙한 서비스를 청년의 이름으로 포장했다는 인식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모호한 집단적 수식어로서 마케팅 기법으로 남발되며 오염된 거죠.
그러면서 시선을 정치권으로 옮겨봤습니다. 매번 등장하는 ‘청년 정치인’이라는 타이틀은 과연 안녕한가. 청년 정치는 기성세대와의 투쟁이자, 구시대적 관행을 향한 날카로운 정곡일 텐데요. 경험은 부족할지언정, 낡은 질서에 도전하며 명확한 어젠다를 던지는 거죠.
그런데 어쩐지 요즘은, 청년 상호와 청년 정치인이 오버랩되는 불길한 느낌은 뭘까요. 최근 정당의 기탁금 부담에 오열했던 한 청년 정치인이 고가의 테슬라 신차 차주로 뒤늦게 알려지자 돈 없어 운 게 아니라고 해명하는 장면이 불쑥 떠올랐던 것일까요.
대다수 청년 정치인을 만나보면 하나같이 참신함과 진정성을 외칩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듯합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그들이 왜 청년 정치인이 돼야 하는지 의문일 때가 많죠. 청년이라는 생물학적 나이를 일종의 스펙이자 정치권 진입을 위한 프리패스 티켓으로 활용하려는 기류가 있는 건 아닌지 떠올리게끔 하는 겁니다. 어떻게 하겠다는 말 대신에, 화려한 비전이나 어둡고 잔혹한 문제의식을 부각하는 구호만 토해내니까요. 그러면서 또 하나의 계파가 되고요. 여의도 엘리트 문법을 그 누구보다 빠르게 체화합니다. 나이만 젊을 뿐, 사고방식과 정치 공학적 셈법은 기성 정치인과 다를 바 없는 젊은 꼰대가 비로소 탄생하게 되죠.
결국 정치를 하고 싶은 이유가 정치인 그 자체로 변질됩니다. 이제는 정치인이 되고자 정치를 하는 거죠. 하긴 정치권에서는 이런 말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변호사였던 정치인이 정치권을 떠나 다시금 변호사로 돌아왔을 때, 소장 작성을 위해 컴퓨터를 켜도 멍하니 있게 된다고요. 나랏일을 하다가 비교적 작은 일을 하려니,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이야기일 텐데요. 그만큼 직업으로서의 정치인에 대한 유혹이 상당하다는 것일 겁니다. 이건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데, 왜 그럴까요.
1992년 마지막 우승 이후 프로야구 롯데 자이언츠는 매 시즌 “올해는 다르다”는 다짐을 외칩니다. 여느 학생이나 “이번엔 공부를 잘하겠다”고 다짐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어떻게’죠. 야구선수 하려고 야구하는 것이 아니며, 학생을 하려고 공부하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특히 요즘은 청소년 진로 지도를 할 때, 장래 희망을 명사인 직업으로 두지 말고 동사로 나타내라고 조언한다고 하죠. 예를 들어 ‘의사’가 아니라 ‘아픈 사람을 돕는 자’로 말입니다. 의사라는 타이틀 자체가 목적이 된 사람은 가운을 입는 순간 길을 잃기 쉽지만, 타인을 돕겠다는 목적을 가진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역할을 찾아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청년 정치의 현주소를 곱씹어보게 됩니다. 정치인이 되기 위한 청년 정치인지, 청년 정치를 위한 정치인인지 말입니다. 오히려 청년 타이틀이 기득권 정치로 진입하기 위한 편법적 등용문으로 쓰이거나, 윗선의 의중을 대변하는 젊은 거수기 역할로 전락한 건 아닌지. 그리고 기성 정치는 쇄신의 이미지를 연출하기 위해 청년을 쇼윈도에 전시하지만, 기성 정치인의 스피커 노릇이나 특정 계파의 전위대 역할로 소비하고 있지는 않은지.
이제 다시, 상호에 청년이란 단어가 들어간 가게를 생각해 봅니다. 어떤 사장님은 피해자가 아닐는지 말입니다. 얄팍한 상술 대신 진짜 열정과 혁신, 가성비로 승부하는데 ‘청년팔이’로 인해 오염된 단어의 무게를 억울하게 감당하는 건 아닐지 말입니다. 그리고 수많은 청년은 대표성이 사라진 청년 정치인 대신에, 기성 정치인으로부터 계도적으로 접근되고 있는 건 아닐지도 고민해 보게 하죠. 그래서 ‘청년’이라는 단어가 알량한 시혜나, 누군가의 손쉬운 성공을 위한 마법의 주문으로 소비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 단어가 본래 품고 있던 뜨거운 열정과 서툰 도전을 있는 그대로 응원할 수 있는 사회가 되기도 함께 바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