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패션업계의 지형도는 과거와 크게 달라졌다.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외형 매출을 얼마나 가파르게 끌어올리는지, 오프라인 매장을 몇 개나 확장하는지가 기업의 성패를 가르는 잣대였다. 그러나 지금 패션전문지들의 헤드라인을 채우는 화두는 정반대이다. 무리한 외형 확장 대신 D2C 자사몰 중심의 내실 있는 수익 구조 확보, 감각에 의존하던 기획을 넘어선 AI 기반의 데이터 SCM(공급망 관리), 그리고 재고 리스크를 최소화하는 QR(Quick Response) 생산 체제 전환이 업계 전체의 절박한 과제로 떠올랐다.
소비 시장 역시 극심한 양극화와 고물가라는 거센 파도를 맞닥뜨리고 있다. 한쪽에서는 극한의 가격 경쟁력을 내세운 초저가 플랫폼이 득세하고 있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자신만의 명확한 취향과 가치를 증명해 주는 브랜드에 기꺼이 가치를 지불한다. 과거와 같은 무분별한 할인 기획전만으로는 스마트해진 고객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 이제 고객은 단순히 ‘옷 한 벌’을 사는 것이 아니라, 그 브랜드가 지나온 시간과 진정성, 그리고 타협하지 않는 품질의 약속을 구매하는 것이다.
이러한 현장의 급변은 기업 경영을 이끄는 주체들에게 깊은 성찰을 요구한다. “얼마나 많이 팔았는가”라는 숫자보다, “세일에 의존하지 않고 제값에 가치를 인정받는 브랜드인가”, “우리 브랜드의 시그니처 아이템이 세대를 이어 선택받고 있는가”가 기업의 생존을 가르는 본질이 되었다. 다수의 패션 기업들이 비효율 점포를 대대적으로 정돈하고 코어 아이템에 집중하며 체질 개선에 사활을 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최근 디지털 기술과 AI의 발전은 상품 기획부터 수요 예측, 고객 분석에 이르기까지 산업 전반을 거세게 바꾸고 있다. 세정 역시 유연한 생산 시스템과 첨단 기술을 적극 채택하며 시대를 앞서가기 위해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하지만 기술이 아무리 고도화되더라도 결코 대신해 줄 수 없는 영역이 있다. 바로 ‘브랜드가 가진 고유한 혼(魂)과 장인정신’이다. 빅데이터가 적정 생산량을 제시해 줄 수는 있어도, 고객의 피부에 닿는 원단의 깊이 있는 질감이나 수십 년 노하우가 집약된 단 한 끗의 핏을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속도와 효율이 미덕이 된 시대일수록 가슴에 새기게 되는 말이 있다. 옛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지혜이다. 이는 변화를 거부하고 지나간 영광에 안주하라는 뜻이 아니라AI 생산 체제나 D2C 혁신 같은 ‘새로운 그릇(創新)’을 주저 없이 받아들이되, 반세기 동안 고객과 쌓아온 ‘품질과 신뢰라는 철학(法古)’을 굳건히 지켜내라는 가르침이다.
유행은 한 계절을 이끌며 화려하게 스쳐 지나가지만, 명문 브랜드는 시간을 먹으며 비로소 완성된다. 세정 역시 50년 전 부산 중앙시장의 작은 가게에서 출발해 오늘에 이르기까지 IMF 외환위기, 글로벌 금융위기, 이커머스의 대두, 그리고 지금의 AI 전환기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위기와 변혁을 겪었다. 그 엄혹한 시련 속에서도 우리가 시장의 선택을 받을 수 있었던 단 하나의 이유, 그것은 “고객에게 가장 좋은 품질과 정성스러운 옷을 선보인다”는 초심을 단 한 순간도 타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패션은 시대를 가장 앞서 읽고 제안해야 하는 산업이다. 그러나 시대를 좇아가기만 해서는 결코 오래 살아남을 수 없다. 무엇을 유연하게 혁신할 것인가를 고민함과 동시에,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절대로 바꿀 수 없는 우리의 뿌리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아는 기업만이 시대의 풍파를 견뎌낸다.
진정한 명가는 비바람 속에서도 뿌리를 더 깊게 내리는 법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 세정이 쌓아온 헤리티지는 단순히 세월의 무게가 아니라, 매 순간 고객의 신뢰를 무겁게 받아들여 온 책임감의 기록이다. 다가올 미래에도 우리는 과거의 영광에 기대기보다 시대의 변화를 선도하는 유연함으로, 또 한 번 세대에 영감을 주는 브랜드로 진화해 나갈 것이다.
세정은 앞으로도 첨단 기술과 시장 변화에는 누구보다 민첩하고 적극적으로 대응할 것이다. 그러나 고객에게 더 뛰어난 제품과 변함없는 가치로 보답하겠다는 초심만큼은 단단히 지켜낼 것이다. 변함없는 가치를 지키며 날마다 새로워지는 것, 그것이 세정이 걸어온 50년 역사이자, 앞으로 펼쳐갈 지속 가능한 경영의 변함없는 원칙이다.
늦더위가 기세를 부리는 성서(盛暑)의 계절, 현장에서 고군분투하는 모든 패션 종사자와 기업들이 지치지 않고 새로운 영감과 활력을 얻으시길 바란다. 혹독한 폭염을 견뎌내고 맺히는 결실처럼, 변화의 파도 속에서도 자신만의 색을 고수해 온 브랜드들이 결실의 계절에 더욱 눈부시게 빛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