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켜보면 어이가 없긴 하지만 과거 윤석열 전 대통령 재임 당시 제일 잘 했다고 평가 받은 게 ‘외교’였다. 2023년 4월 한미정상회담 당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주재한 국빈만찬에서 윤 전 대통령이 열창한 ‘아메리칸 파이’는 두고두고 회자됐다. 실제로 꽤 잘 부르기도 해서 윤 대통령을 다시 봤다는 평도 많았고, 당시 선곡이 어떤 심오한 의미가 있는지 여러 해석이 나올 정도였다. 그는 또 2030 부산 엑스포 유치를 위해 시간을 쪼개 수많은 정상을 만나 협조를 요청하기도 했다. “만나기만 하면 표가 오는 게 보인다”던 모 당국자의 말과 달리 결과적으로 충격적인 탈락을 맞게 됐고, 그의 ‘외교 허니문’도 끝났다.
‘외교 천재’ 이재명 대통령도 취임 후 첫 해 많은 성과를 냈다. 딱 1년 전인 2025년 8월 25일 백악관 정상회담에서 이 대통령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대화하며 ‘페이스메이커론’을 처음 꺼냈다. 문재인 정부에서 ‘한반도 운전자론’을 내세우며 한반도 문제에 주도권을 갖겠다고 선언한 게 불과 몇 년 전인데 페이스메이커라니…. ‘저자세 외교’란 비판이 쏟아지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예상과 달리 당시엔 비판보다는 긍정적인 평가가 많았다. 과시욕이 많은, ‘피스 메이커’를 자처한 트럼프에 보조를 맞춰주고, 우리 국익에 도움 되는 성과만 얻어온다면 자존심은 좀 상해도 괜찮다고 느낀 걸까. 어찌 됐든 고도의 전략적 언급으로 해석되는 분위기였다.
그로부터 정확히 1년 뒤 판은 바뀌었다. 그야말로 ‘예측 불가’인 트럼프 대통령이 우리가 페이스를 맞출 기회를 주지 않고 북미대화를 향해 저만치 달려가고 있다. 이란 전쟁 장기화의 늪에 빠져 외교성과가 절실한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비위를 맞추며 담판을 준비하고 있다. 한국은 페이스메이커가 되긴커녕 ‘참관인’이 되게 생겼다.
그 시점도 얄궂게 이 대통령이 광복절 메시지를 통해 ‘종전 협의를 위한 당사자 대화’를 제안한 직후다. 트럼프 대통령은 SNS 문자 하나로 한미연합훈련를 반토막 내더니 연내 북미대화를 공식화하고, 이젠 북핵 용인까지 시사하며 ‘북한 비핵화’라는 오랜 기조마저 무너뜨릴 기세다.
더 당황스러운 건 우리 정부의 반응이다. 사전에 훈련 축소를 통보조차 받지 못한 우리 정부와 이 대통령이 유감 표명 대신 내놓은 반응은 “트럼프 대통령의 결단에 경의를 표한다”였다. 북미대화를 통해 한반도 평화가 앞당겨진다면 분명히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그래도 순서가 있는 법. 동맹간 협의가 없었던 것에 대한 유감과 그럼에도 동맹의 정신을 살려 협의를 지속하겠다는 메시지, 그 다음 정도에 북미대화에 대한 기대감을 내놓는 게 순서이지 않을까.
워낙 찰진 욕을 구사하며 우리 정부를 비난해온 북한이 오랜만에 얼굴을 화끈거리게 하는 논평을 내놨다. ‘가긍한 처지’‘지휘권을 상전에게 맡긴 허수아비 군대의 숙명’ 등 노골적인 북한의 조롱이 아프게 느껴진다.
어느 때보다 오래 갈 것 같았던 이 대통령의 허니문은 1년 여만에 짧게 끝났다. 부동산 민심을 얼어붙게 만든 세제 개편과 도박장이 된 한국 증시와 함께. 그리고 개정하자마자 보완 지시를 내린, 대통령조차 읽어보지 않았다는 검찰 수사권 폐지 조문과 함께….
그리고 지금 한반도를 둘러싼 안보환경의 충격은 이 대통령의 국정 동력과 외교 주도권을 급격히 추락시킬 수 있다는 불안감에 휩싸이게 한다. 이제라도 한반도 운명을 건 트럼프 대통령의 도박판을 구경만 하는 자리에 있어선 안 된다. 한 때 ‘한반도 운전자론’이 냉혹한 국제정세 속 ‘허상’에 불과했다는 지적을 받았지만 운전석을 타인에게 온전히 넘겨준 채로는 우리의 안전을 담보할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당사자인 한국의 입지가 위축된 채 북미 협상이 진전돼 북핵 용인 같은 ‘나쁜 합의’를 가져온다면 그로 인한 안보 부채는 오롯이 우리 국민의 몫이 될 수밖에 없다. 지금 필요한 것은 수동적인 칭송이나 ‘패싱’의 무력감도 아닌 오직 국익만을 고려한 냉철하고 전략적인 접근일 것이다.
정유선 서울정경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