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SK하이닉스 생산직 노조는 초과이익분배금(PS)의 60%를 자사주로 지급하는 잠정 합의안을 25표 차로 부결시켰다. 이는 올 초 삼성전자노동조합의 상여금 투쟁을 연상시킨다. 삼성전자의 성과급 논쟁은 노동운동에 하나의 질문을 던졌다. ‘노동자란 누구이며 노동조합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이다. 당시 삼성전자 노사 합의에 따르면 올해 영업이익 300조 원을 달성하면 메모리사업부 노동자는 연봉 외에 약 6억의 성과급을 추가로 받는다는 계산이 나왔다. 실제 확정 지급액은 아니지만 노동소득의 상식을 바꿀 만한 숫자였다. SK하이닉스도 영업이익의 10%를 PS 재원으로 삼는 제도 때문에 올해 실적 전망에 따라 평균 수억 원의 성과급이 거론된다.
전에 접해보지 못한 천문학적 액수에 사회 전체적으로 논쟁이 뜨거웠다. 한쪽에서는 “이익을 만든 노동자가 정당한 몫을 요구하는 것이 왜 문제냐”고 묻는다. 성과급을 억제하면 결국 주주와 경영진에게 더 많은 몫이 돌아갈 뿐이라고 했다. 반대쪽에서는 대기업 정규직이 기업의 초과이윤을 독점적으로 나눠 갖는 구조가 원·하청, 대·중소기업 노동자의 격차를 더 벌리고 노동연대를 무너뜨린다고 비판한다.
고전적인 관점에서 노동자란,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않고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 생활하는 사람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노동자 역시 노동자다. 많이 받으니 노동자가 아니라는 주장은 성립할 수 없다. 그러나 문제는 소득의 액수가 아니라 역대급 성과급을 바라보는 다양한 이해관계와 사회적 의식의 방향이다.
일각에서는 이들을 노동귀족이라 비난했다. 대략 노동귀족이란 ‘독점이윤의 일부를 누리며 전체 노동자의 이해보다 자신이 속한 집단의 특권을 우선하는 층’을 말한다. 기업의 초과이윤과 노동자의 소득이 강하게 연결될 때, 회사와 자신을 결속하려는 노동자의 의식도 강화된다. 함께 근무하는 중소기업 노동자와의 연대보다 오히려 자본과의 결속이 더 강력해지는 것이다. 이것은 기업별 노조가 오래도록 안고 있던 구조적 함정이기도 하다.
숫자는 이미 그 위험을 보여준다. 지난해 중소기업 노동자의 월평균 임금 총액은 대기업의 53.2%였고, 특별급여는 대기업의 17.4%에 불과하다는 통계도 있다. 이런 현실에서 노동조합이 고액 성과급을 ‘조합원의 정당한 몫’이라고 말하는 것을 TV 앞에서 보는 하청 노동자도 같은 생각이었을까? 고액 성과급을 요구하는 노동자를 비난하자는 것이 아니다. 이전에는 개별 기업이 초과이윤을 어떻게 나누는가에 관심을 가져본 적도 없었다.
그래서 더 큰 책임은 노동운동의 지도부에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기업별 노동조합의 위원장이 자기 조합원의 요구를 외면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정규직노동조합이 투쟁으로 이뤄낸 사례들이 있다. 대부분 지도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산별과 총연맹 역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조합원의 요구가 노동운동 전체의 가치와 어떻게 조화를 이룰 것인가를 고민하고 끌어내는 지도력을 보였다고 보기 어렵다.
스웨덴 금속노조의 임금노동자기금, 미국 자동차노동조합(UAW)의 패턴교섭, 그리고 스페인의 몬드라곤 협동조합은 공통점이 있다. 잘 나가는 회사의 초과이익이 전체 노동자를 위해 유의미하게 사용될 수 있는 방안을 놓고 고민한 흔적이라는 것이다. 어느 것이 정답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스웨덴은 정치적 반발 속에 무산됐고, 미국의 산업별 연대 역시 노동조합 조직률의 하락과 함께 약해졌다. 그러나 이 사례들이 보여주는 공통점은 분명하다. ‘조합원이 얼마나 더 받을 것인가’와 ‘노동자 전체의 연대를 어떻게 지킬 것인가’하는 두 개의 질문 앞에 흔들리지 않고 맞섰다는 사실이다.
지금 한국 노동운동도 같은 질문 앞에 서 있다. 기업이 벌어들인 초과이윤을 어디까지 자신의 몫으로 볼 것인지, 하청, 중소업체 노동자와의 연대는 어떻게 할 것인지 등에 대한 질문이 그것이다. 상급단체의 역할은 노동 전체의 관점에서 이 질문을 공론화하는 데 있을 것이다. 과연 한국 노동운동이 이 위기적 상황(?)에서 ‘계급’이라는 이름을 쟁취하는 것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인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