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이후 지속된 대한민국 민주주의가 위기 상황이다. 탄핵이 반복되고 있어서는 안 될 계엄도 일어났다.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에도 대통령 재판 공소 취소 시도, 연임제와 5·18 헌법 전문 수록 등 개헌 논쟁, 대법원장 제청권과 대통령 임명권의 대립, 헌법에 명시된 ‘검사’ ‘검찰총장’ 직책을 도외시한 검찰 해체를 비롯해 형사사법 체계 변화 등 법치 파괴와 헌정 질서 교란 논란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가 더 이상 진전되지 못한 채 곳곳에서 파열음이다.
혐오 기반 팬덤 정치, 증오 앞세운 극단적 진영 정치, ‘국민의 뜻’ 빙자한 포퓰리즘, 일방적 형사사법 체계 전환, 협치 없는 대립 등 민주주의 위협 현상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근원에서부터 진지한 접근이 필요한 시점이다. 민주주의는 지고지순한 이념이나 사상이 아닌 정치 체제다. 체제는 체제 지탱의 원리가 있고, 원리를 실행하는 체계가 있다. 체계가 붕괴되면 체제도 무너진다. 민주주의는 주권재민 원칙, 법치주의 이념, 삼권분립 시스템의 세 가지 핵심 원리로 유지된다.
민주주의는 대단히 불안한 정치 체제다. 대중 선동과 권력 집중, 포퓰리즘과 중우정치가 늘 민주주의를 위협한다. 고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도 선동가들에 의해 법치가 훼손되고 ‘충동에 좌우되는 어리석은 무리’ 즉 중우(衆愚)들에 의해 민주정은 타락할 수 있다고 했다. 과연 대한민국 정치는 민주주의 원리에 충실할까. 첫째, 국민주권은 왜곡되고 무책임한 정치 선동이 난무한다. 헌법 1조에 명시된 ‘주권재민’은 국가 의사 최종 결정 권력이 국민에게 있다는 헌법의 근본 원칙이다.
이는 원칙일 뿐 현실적으로 국민의 직접 통치는 불가능하다. 그 대안으로 국민이 직접 선출한 대표자를 통해 주권을 행사한다. 민주주의는 대의민주주의다. 직접민주주의, 광장 민주주의란 미명하에 ‘권력을 국민에게 돌려준다’는 감언이설로 정치인의 책임은 방기되고 정치적 실패 책임은 국민에게 전가된다. ‘국민의 뜻’은 동일하지 않고 이해와 욕망도 다 다르다. 이를 잘 조정하고 갈등을 해소하는 게 정치인의 책임이다. ‘국민주권’을 남발하며 ‘당원주권’으로까지 확장하고 지지자를 동원해 극단적 진영 갈등만 증폭시키고 있다. ‘국민주권’이 정치인들의 대중 동원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
둘째, 법치의 근간이 훼손되고 있다. 헌법은 국가의 법 기초를 정하고 국가 통치 체제의 근본이 되는 국가의 근간이다. 그 누구도 헌법의 규정에서 벗어날 수 없다. 국가는 사법의 단단한 반석 위에 서 있다. 법치가 훼손되면 국가 기강과 영(令)이 다 허물어진다. 윤석열 전 대통령은 적법 절차를 어긴 계엄으로 탄핵당해 재판받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대통령 재판 ‘공소 취소 특검법’을 발의했다가 국민적 역풍을 맞았다. 대통령이 기자회견에서 특검법에서 ‘공소 취소 조항 삭제’를 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작 기소 특검법이 시도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삼권분립도 위협받고 있다. 삼권분립은 권력분립이다. 프랑스 철학자 몽테스키외는 ‘법의 정신’에서 한 사람이나 한 집단이 행정·입법·사법을 모두 장악하면 필연적으로 독재와 폭정이 발생하며, 시민의 자유와 권리는 3대 권력의 균형과 견제를 통해서만 보장된다고 강조했다. 가장 황당한 건 ‘선출 권력이 임명 권력보다 우위에 있다’는 주장이다. 국민이 뽑은 선출 권력을 존중해야 하지만 더 많은 권한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서열이 될 수는 없다. 입법·행정·사법은 각각 독립된 기능을 수행하고, 민주공화국에서 그 어떤 권력도 다른 권력 위에 설 수 없다. 사법부 독립은 특권이 아닌 권력의 남용을 막기 위한 헌법적 균형의 한 축이다.
선출 권력은 선거와 지지율에 늘 휘둘리기 때문에 이로부터 자유롭고 전문성을 가진 임명 권력의 견제를 통해 균형을 잡는 게 삼권분립의 원리다. 사법 권력이 침해받지 않도록 대통령·국회·대법원장이 함께 중립적 인사를 임명한다. 대부분 민주 국가의 사법부 구성 방식이 유사한 건 오랜 세월 검증된 사회적 진화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우린 80여 년 전 절대권력자 히틀러를 경험했다. 민주공화국은 사법의 반석 위에 세워진 집이고 사법이 흔들리면 민주공화국도 허물어진다. 사법은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다.
정책 실패는 시간이 좀 걸려도 만회하면 된다. 정부의 실기는 다음 정부에서 바루면 된다. 하지만 국가의 근간이 되는 국민주권, 법치, 삼권분립이 훼손되면 돌이키기 어렵다. 베네수엘라뿐 아니라 대부분 실패한 민주주의 국가는 이 세 원리가 붕괴됐다. 민주주의가 늘 위협받고 취약한 건 지킬 의지가 없으면 하염없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사회든 국가든 신뢰가 흔들리면 무너진다. 신뢰는 말이 아닌 약속을 지키는 데서 시작되고, 국가공동체의 신뢰는 헌법과 법률을 준수하고 임의로 훼손하지 않는 데서 지켜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