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답지 않게 왜 그래?” 부모가 아이에게 종종 하는 말이다. 걱정에서 나온 말일 수 있다. 기대와 다른 행동을 봤을 때 나온 말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 짧은 문장에는 큰 전제가 숨어 있다. 부모가 이미 ‘너다운 모습’을 알고 있다는 전제다. 정말 그럴까.
부모는 아이를 오래 본다. 표정과 말투, 성적과 친구 관계,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가까이서 지켜본다. 그래서 아이를 잘 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부모가 보는 것은 언제나 ‘해석된 아이’다. 눈앞의 아이에 자신의 기대와 판단을 덧붙여서다. 부모의 해석에는 자신의 경험도 끼어든다. 내게 중요했던 것은 아이에게도 필요해 보인다. 자신에게 쉬웠던 것은 아이도 어렵지 않게 해낼 거라 생각한다. 문제는 그것을 ‘내 기준’이 아니라 ‘세상의 기준’으로 받아들인다는 거다.
예컨대 아이가 새로운 일을 앞두고 망설인다. 부모 눈에는 자신감이 부족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충분히 이해한 뒤 움직이는 성향일 수도 있다. 준비되지 않은 채 시작하는 상황을 불편해하는 아이일 수도 있다. 부모의 해석과 아이 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
해석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해석하며 산다. 문제는 그 해석을 수정 가능한 가설이 아니라 아이의 정체성으로 굳히는 순간이다. “우리 아이는 원래 이래.” “넌 이런 성격이야.” “너는 이 길이 맞아.” 이런 말이 반복되면 부모의 해석은 아이의 설명서가 된다. 설명서는 곧 경계선이 된다. 그 안에 있으면 ‘너다운 아이’이고, 벗어나면 ‘너답지 않은 아이’가 된다. 이름하여 ‘해석의 소유’다.
해석의 소유는 은밀하다. 진로를 대신 정하지 않아도, 공부를 강요하지 않아도 가능하다. 아이가 어떤 사람인지 부모가 대신 정의하면 된다. 사랑에서 출발한 해석도 정답으로 굳는 순간 통제가 된다. 아이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보다 부모가 자신을 어떻게 보는지를 먼저 살피기 시작한다. 아이의 가능성이 좁아지는 지점이다.
부모에게는 부모로서의 책임이 있다. 위험을 막고 기준을 세우며 때로는 안 된다고 말해야 한다. 하지만 아이의 정체성까지 부모가 규정해서는 안 된다. 더구나 아이에게 고정된 ‘본모습’이 따로 있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아이는 계속 변한다. 좋아하는 것도 바뀌고 잘하는 것도 달라진다. 친구를 만나고 실패를 겪고 새로운 세계를 접하며 이전과 다른 사람이 된다.
그렇다면 우리 아이의 ‘나다움’을 찾는다는 말도 달라져야 한다. 어딘가에 숨겨진 아이의 본모습을 찾아내겠다는 뜻이 아니다. 지금 무엇에 끌리고 무엇을 힘들어하는지, 어떤 관계에서 살아나고 무엇을 스스로 선택하려 하는지를 계속 알아가는 일이다. ‘나다움’은 명사가 아니다. 동사다. ‘완성된 정체’가 아니라 ‘되어가는 과정’이다.
AI 시대에는 이 문제가 더 중요해진다. 기술 변화의 속도가 빨라질수록 오늘의 유망한 기술과 직업이 내일도 유효할지 알 수 없다. 부모는 불안할 수밖에. 그래서일까. 요즘 AI 특강 때 많이 받는 질문들? 우리 아이, 코딩을 시켜야 할까. AI를 얼마나 일찍 가르쳐야 할까. 어떤 전공을 택해야 할까. 무엇을 준비해야 뒤처지지 않을까. 불안이 커질수록 부모는 아이보다 미래를 먼저 본다. 아이를 이해한 뒤 교육을 고르는 게 아니라, 미래를 먼저 예측한 뒤 그 예측에 아이를 맞춘다. 교육의 순서가 뒤집히는 순간, 부모의 불안은 아이의 시간표가 된다. 무엇을 더 넣어줄지 고민하느라 정작 이 아이가 무엇에 반응하고 무엇을 스스로 해보고 싶은지는 놓친다. 아이의 미래를 준비하느라 현재의 아이를 잃는 역설이다.
그래서 AI 시대 자녀교육의 첫 질문은 ‘무엇을 가르칠까’가 아니다. ‘나는 지금 이 아이를 제대로 보고 있는가’다. 내가 보고 있는 아이가 있는 그대로의 현실 속 아이인지, 내 기대와 불안이 덧칠된 해석 속 아이인지 계속 확인해야 한다. 이미 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어제의 아이로 오늘의 아이를 재단해선 안 된다. 사랑한다는 건 궁금해하는 거다. 다 안다고 믿는 사람은 더 이상 묻지 않는다. 궁금해하는 사람만 다시 본다. 좋은 부모는 아이의 정답을 아는 사람이 아니다. 아이가 자기답게 되어갈 수 있도록, 자신의 해석을 끝내 정답으로 틀을 짓지 않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