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북항 친수공원 인공수로에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1.5㎞의 물길을 유영하는 3m가량의 암컷 흑상어 ‘부캉이’다. 사진과 영상이 쏟아지고 사람들이 몰렸다. 부산시는 부캉이를 명예홍보대사로 위촉했다. 부캉이 출현 이후 북항 친수공원 누적 방문객은 100만 명을 넘어섰고, 주변 상권도 때아닌 특수를 누린다. 야생의 상어 한 마리가 어느새 ‘보고 싶은 존재’가 됐다. 부캉이의 출현은 그렇게 하나의 스펙터클이 됐다.
그러나 더욱 흥미로운 것은 부캉이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다. 상어는 위험한 포식자이자 두려움의 대상으로 각인돼 왔다. 그런데 북항에서는 “계속 있었으면 좋겠다” “부캉이~ 얼굴 좀 보자”는 말까지 나왔다. 상어에게 건네는 말치고는 꽤 다정하다. 어쩌면 ‘상어’라는 종보다 ‘부캉이’라는 한 생명을 보기 시작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두려움의 대상이던 포식자를 개별적인 생명으로 바라보는 순간, 사람과 야생의 생명 사이에는 다른 관계가 시작된다. 좁은 수로를 유영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동안 낯선 포식자는 어느새 안위를 궁금해하는 존재가 됐다.
부산에는 이 장면과 겹쳐지는 오래된 이야기가 있다. 수영천과 온천천이 만나는 세병교는 ‘안뜰교’라고도 불렸다. 조선시대에는 바닷물이 이곳까지 들어왔고, 고래 떼가 제집 안뜰처럼 노닐었다 해서 붙은 이름이라고 전해진다. 오래전 안뜰교의 고래와 오늘 북항의 부캉이는 서로 다른 시간에 존재하지만 인간과 바다 생명이 어떻게 공간을 나누어 왔는가라는 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오래된 지역의 기억은 오늘의 사건과 만나 새로운 질문이 된다.
이러한 관심은 부캉이만의 일은 아니다. 2018년 영국 템스강에 벨루가 ‘베니’가 나타났다. 북극권에 사는 벨루가가 그레이브젠드 앞 템스강에 머물자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주변 상점과 카페도 활기를 띠었다. 그러나 관심은 구경에 머물지 않았다. 지방정부는 베니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는 판단에 1만5000명가량이 찾을 예정이던 연례 불꽃놀이를 연기했다. 베니는 석 달 가까이 템스강에 머물다 결국 스스로 떠났다. 한 생명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모였고, 다시 그 생명을 위해 인간의 행동을 바꿨다.
최근 대전 중구가 효문화뿌리축제의 불꽃놀이를 취소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축제장 주변 야생동물의 서식 환경을 고려한 결정이었다. 인간을 위해 준비한 불꽃을 다른 생명을 위해 멈췄다.
이처럼 다른 생명의 존재가 인간의 감정뿐만 아니라 행동까지 바꾸는 장면은 생태미학의 질문과 맞닿아 있다. 자연을 인간이 감상하는 대상으로만 한정하지 않고 인간과 환경의 관계 속에서 미적 경험을 다시 생각하는 것이 생태미학이다.
현대미술에서도 이러한 질문은 이어져 왔다. 프랑스 작가 피에르 위그는 2012년 카셀 도큐멘타에서 공원의 퇴비장을 하나의 생태적 환경으로 만들었다. 식물과 개가 살아가는 그곳에는 여성 누드상의 머리를 살아 있는 벌집으로 만든 조각도 놓였다. 벌집은 생애주기와 주변 환경에 따라 변화했고 작품 역시 완성된 형태에 머물지 않았다. 작가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대신 비인간 생명과 자연의 과정이 작품을 변화시켰다. 인간이 한발 물러서자 식물과 동물, 환경이 저마다의 시간으로 작품을 만들어갔다.
사상가 도나 해러웨이는 인간과 다른 종을 서로 독립된 존재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 영향을 주고받으며 ‘함께-되어가는’ 존재로 보았다. 공존은 단순히 같은 공간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다른 생명의 존재와 필요에 응답하며 우리의 태도와 행동을 조정하는 일이다. 그 변화는 지금 북항에서도 시작되고 있다. 부산시는 부캉이에게 강한 조명을 비추거나 먹이를 주는 행위, 놀라게 하거나 자극하는 행동을 삼가고 거리를 두고 지켜봐 달라고 당부했다. 보고 싶은 마음보다 한 생명의 안위를 먼저 생각하기 시작했다.
부캉이가 북항에 머물지, 다시 바다로 나갈지는 알 수 없다. 두 차례 외해 유도는 뜻대로 되지 않았다. 국립수산과학원은 부캉이의 유영 행동과 건강 상태를 살피고 있다. 북항 환경이 부캉이에게 적절한지도 더 지켜봐야 한다. 머무는 것이 안전하다면 기다리고, 위험해진다면 필요한 대응을 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원하는 답을 부캉이에게 먼저 정하지 않는 일이다.
어쩌면 부캉이는 우리에게 생태미학의 가장 어려운 질문을 던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름다운 것을 오래 바라보는 것도, 우리가 생각하는 자연의 자리로 돌려보내는 것도 정답은 아니다. ‘보고 싶은 존재’에서 그 생명의 필요를 살피는 존재로 시선을 옮기고, 그에 맞춰 우리의 행동을 바꾸는 것. 그것이 공존에 가까운 태도다.
부산의 바다에 찾아온 한 손님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그 손님이 머문다면 어떻게 함께 지낼 것이며, 떠나야 할 때 어떻게 길을 내어줄 것인가. 진정한 환대는 손님의 행로를 우리가 정하는 데 있지 않다. 머물 때 자리를 내어주고, 떠날 때 안전하게 배웅하는 일이다. 부캉이는 볼거리로 찾아왔지만, 우리에게 공존이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