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은 새로운 아이디어나 기술이 상용화를 거쳐 제품과 서비스의 형태로 최종 소비자에게 확산되는 것을 뜻한다. 실험실의 발명이 곧 혁신은 아니다. 연구개발(R&D)로 태어난 기술이 상용화의 문턱을 넘고, 투자를 받아 시장으로 퍼져 나갈 때 비로소 혁신이 완성된다. 그래서 혁신의 핵심은 ‘새로운 기술’과 ‘상용화’ 그리고 ‘확산’이다.
도전적인 기술일수록 상용화의 벽은 높다. 연구실과 시장 사이에 놓인 이 간극을 흔히 ‘죽음의 계곡’이라 부른다. 그 계곡을 건넌 기술은 확산의 동인이 큰 만큼 엄청난 부가가치를 낳고, 때로는 새로운 기술 시대를 연다. 2007년 등장한 아이폰이 그랬고, 2022년 출시 두 달 만에 이용자 1억 명을 모은 챗GPT가 그랬다. 혁신의 크기는 발명의 순간이 아니라 확산의 과정에서 결정되는 셈이다.
과거에 상용화와 확산은 길고 비용이 많이 드는 여정이었다. 그런데 AI가 그 시간을 놀라울 정도로 단축시키고 있다. 벤처캐피털 액셀의 분석에 따르면 2023년 이후 탄생한 유럽·이스라엘의 유니콘 86곳 가운데 20%가 창업 2년 안에 기업가치 10억 달러를 넘었다. 생성형 AI 이전에는 5%에 불과했다. 말만 하면 앱을 만들어 주는 스웨덴의 러버블은 서비스 출시 8개월 만에 유니콘이 되었고, 올해 8월 기업가치가 133억 달러로 뛰었다.
비용도 급감했다. 이스라엘의 한 개발자가 AI를 동료 삼아 혼자 창업한 베이스44는 6개월 만에 8000만 달러에 매각되었다. 오픈AI의 CEO 샘 올트먼은 AI 덕분에 ‘1인 유니콘’이 등장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수년의 시간이 걸려 수백 명의 인력이 하던 일을 AI가 대신하는 시대다. AI는 혁신의 속도와 크기를 함께 키우는 ‘혁신의 증폭기’가 되었다.
부산의 혁신 생태계는 아직 이 시대의 조류에 올라타지 못하고 있다. 노동력 중심의 제조업이 부산 경제를 지탱해 왔지만, 도전적인 R&D에 나설 여력은 넉넉하지 않다. 부산 주요 기업의 매출액 대비 R&D 투자 비율은 아직 0.7%다. 남은 과제는 R&D 성과를 시장가치로 전환하는 일이다. 2024년 부산이 확보한 국가 R&D 예산 1조1100억 원 가운데 사업화의 주체인 기업이 수행한 몫은 26%였다.
여기에 지역대학이 길러낸 AI 전환(AX) 인재들의 수도권 유출이 겹친다. 지난해에도 청년 6375명이 부산을 떠났다. 이런 여건에서는 부산 제조업의 AX가 제 속도를 내기 어렵다. 기존 기업의 단기 애로 해결에 맞춘 수요자 중심의 R&D 정책만으로는 점진적 개선에 머물 뿐, 파괴적 혁신을 기대하기 힘들다. 파괴적 혁신은 주로 기술벤처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이제는 딥테크 벤처를 지역에서 키워 혁신을 시장에 선제적으로 공급하는 ‘공급자 중심’의 R&D 정책으로 대전환해야 한다. 그래야 R&D 과제가 끝난 뒤에도 지역 혁신생태계가 스스로 굴러간다.
부산을 진정한 혁신도시로 만들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먼저 경제적 파급효과가 큰 도전적인 R&D 과제를 발굴하고 기획해야 한다. 과제를 따내기 위한 R&D가 아니라 시장을 만들기 위한 R&D여야 한다. 해양 항만 물류처럼 부산이 가장 잘 아는 현장에 AI를 접목하는 과제가 그 출발점이 될 수 있다. 다음으로 그 과제를 수행할 혁신공급기업인 기술벤처를 육성해야 한다. 지역의 고급 인재들이 R&D 성과를 자양분 삼아 창업에 뛰어들 유인을 만드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모험자본(VC)과 연계한 확산 시스템을 활성화해야 한다. 부산시가 2030년까지 조성하겠다는 2조 원 규모의 벤처펀드가 도전적 R&D의 성과로 흘러들 때, R&D와 상용화와 확산이라는 혁신의 고리가 비로소 하나로 이어진다. 한 번의 성공이 다음 창업과 투자를 부르는 선순환도 시작된다.
목표는 명확하다. 부산에 뿌리내린 혁신 유니콘 10개다. AI라는 증폭기는 이미 켜져 있다. 이제, 부산이 그 증폭기에 실을 혁신의 신호를 만들어낼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