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천서로. 새벽 산보를 간다. 앞집 금목서가 꽃을 열기 시작했다. 작은 창으로 엉큼하게 파고드는 금빛 향기에 시월이면 수시로 어지럼증이 찾아온다. 뒷산에서 내려온 바람이 팔뚝을 지나 금목서를 흔든다. 수녀님들이 하나둘 골목으로 나온다. 새벽 어둠 속 순백의 수녀복 자락이 은은한 궤적을 그린다. 푸른 새벽을 걸어 나온 하얀 문장이 고요함으로 퍼진다. 성전으로 향하는 침묵이 붉은 담벼락을 따라 걷는다.
골목은 가을 냄새로 바스락거린다. 땅으로 내려온 벚나무 이파리들이 굴렁쇠처럼 굴러간다. 덤성덤성 나무 사이로 하늘을 본다. 무심하게 뻣뻣한 전봇대, 전봇대에서 뻗어 나온 전선들. 세상의 소음이 아직은 일어나지 않는 시간. 전선에 걸린 은빛 새벽달을 보며 느리게 걷는다. 근처 요양병원 밤 근무자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새벽. 골목을 빠져나가는 그들의 밤 이야기가 금목서로 핀다.
저기서 윗집 남자가 걸어오고 있다. 골목을 사이에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엔 묘한 동질감이 쌓인다. 가령, 자주 보이던 사람이 어느 날 보이지 않으면 궁금해진다든가. 우연이라도 마주치면 굳이 소매를 끌어 사탕 한 알 넣어 준다든가.
인사를 했다. 해가 바뀌고 계절이 두 번 바뀌는 동안 남자와 아내를 보지 못했던 것 같다. 남자는 웃지 않았다. 인사 대신 아내가 죽었다고 묻지 않은 답으로 말했다.
나는 남자의 얼굴을 멀뚱히 보며 그대로 섰다. 아내와 걸었던 골목이 한동안 싫었다고 했다. 모퉁이마다 아내의 음성이 숨은 그림처럼 있는 것 같다고…. 집을 잃어버린 아이처럼 아내 없는 골목이 섧다고 했다. 그랬구나. 그 집 앞, 아침이면 열리던 물소리가 들리지 않은 게. 꽃밭에서 흘러내린 물줄기가 대문 밖으로 나오지 않은 게. 쿨렁쿨렁 기침을 하면서 걷는 남자를 한참 봤다. 그의 굽은 등으로 골목 하나가 천천히 지워지고 있었다.
아파트 생활을 끝내고 16년 전 남천서로 골목에 터를 내렸다. 빨랫줄 걸어두고 바삭하게 말라 가는 빨래를 보면서 살았다. 진도견 둘도 키워봤다. 감나무 아래 흙을 채워 채소도 키웠다. 식재료 팔러오는 트럭을 기다리는 즐거움도 있었고 늦은 밤 개 짖는 소리를 듣는 것도 좋았다. 크고 작은 슬래브 집들이 고만고만한 어깨를 기대며 살아가는 동네. 달그락거리는 이웃집 주방 소리가 우리 집으로 건너오는 해거름이면 붉은 저녁 하늘도 온전히 볼 수 있었다.
기울어진 담벼락 사이로 풀들이 자라고 이집 저집에서 심어둔 화초도 골목에서 같이 살았다.
고등어 한 손 구워 건네주던 뒷집 할매, 가까이 딸네를 두고 손주들의 등하교를 지켜주는 할배. 가을이면 송이 캐러 두어 달 집을 비우던 옆집 부부. 오가며 물 한 잔 먹고 가던 사람들과 내가 늙어가는 동안 골목도 다채로운 표정으로 같이 늙었다.
혼자 던져졌다고 생각될 땐 내일이 오는 것조차 두렵다. 파고들 그늘 하나 없을 때 마른 가슴엔 모래바람이 수시로 일어난다. 힘들 때는 저만치 걸어가는 모르는 사람의 그림자도 고마울 때가 있다. 돌아보며 손짓하지 않아도, 애써 말을 걸어주지 않아도 눈앞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만으로 걸어야 할 이유가 되기 때문이다. 앞서가는 사람의 발자국이 어떤 이정표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골목이 그랬다.
새벽이 흩어지고 있다. 여름날의 광휘는 바래졌다. 나는 내 안의 멜로디를 상상하면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성당과 교구청 사이를 벚나무 골목이 끝나는 지점에서 왼쪽으로 올라 수녀원을 지났다. 다시 왼쪽으로 꺾어 도서관 앞 긴 의자에 앉았다.
그 사이 골목을 돌아온 윗집 남자도 도서관 긴 의자에 앉는다. 여름 초입 나온 내 책을 본 모양이다. 어느 대목에선 아내 생각이 나서 울었다고 했다.
지독한 슬픔 뒤에 꺼낸 남자의 말에 공감이란 말을 생각했다. 아침이 된 골목을 보면서 손가락 관절을 오도독오도독 비틀어보았다. 지친 감정의 경계가 경쾌하게 분질러지는 소리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