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의 가공할 발달이 조만간에 인류를 멸종시킬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물론 이러한 공포의 출처를 의심하는 음모론적 시각도 있지만, 어찌하였건 우리가 인류 역사상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시대로 들어섰다는 점만큼은 분명하다.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미디어가 더 이상 도구로 그치지 않는다는 발상은 전자통신 혁명에 대한 불세출의 예언자로 알려진 마셜 매클루언이 이미 오래전에 제시한 바 있다. “미디어는 메시지다.” 더 나아가 “미디어는 마사지다.”
그에 따르면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발명 이래 탄생한 ‘활자인간’은 경험을 선형적이며 균질적 연속체로 파악하는 인지적 습관을 지녔기에 고립되고 고정된 시점에 따라 일련의 정지 화면들처럼 이어지는 획일적이며 반복적인 운동, 예컨대 내셔널리즘이나 자본주의적 생산과 소비의 흐름에 보조를 맞췄다. 이러한 경향은 전자시대에 이르러 전복된다. 이를테면 TV는 서술적 매체가 아니다. 2차원적 화면은 시각적이기보다는 음성-촉각적이다. 매클루언의 제자 월터 옹도 기술 혁신이 새로운 세계관과 불가분의 관계임을 강조한다. 미디어 혁명은 인쇄물의 선형적이고 분석적인 고정성과 구술 언어의 자발적이고 분산적이며 상호작용적인 특성을 결합시켰다. 이로써 문자 기반 시스템에서 알고리즘으로 전환이 이뤄지고, 텍스트·이미지·소리·숫자가 단일 매체로 통합된다. 물론 이 진화 과정은 일방적이지는 않은데, 현재도 여전히 구술성과 문자성이 공존한다.
인간에게 미디어는 물이나 공기와 같다. 우리가 새로운 미디어 환경에 놓였음은 분명하지만, 어차피 미디어·매체의 ‘매개’가 없이는 생각도 소통도 활동도 할 수 없다. 체코 출신의 선구적 미디어 철학자 빌렘 플루서는 지난 세기말에 지금의 우리에게도 참신하게 들리는 통찰을 보여줬다. 그의 지론인 ‘디지털의 환영’은 오랜 인류사를 건너뛰는데, 이에 따르면 오늘날 인간이 이미지에 의해 프로그래밍된다는 사실은 혁명적이기는커녕 오히려 원초적인 상태로의 회귀로 볼 수 있다. 인류는 기본적으로 매개된 존재이다. 언젠가부터 자연적 질서에서 떨어져나온 사람들은 낯설어진 바깥세상과 오직 ‘코드’를 통해 소통해야만 했다. 그들은 세상에 애써 의미를 부여해야 할 만큼 충분히 ‘소외’됐던 것이다. 이미지의 세계는 수천 년 동안 우리 조상들의 존재 양식을 프로그래밍해 왔다. 라스코 동굴 벽화부터 메소포타미아의 벽돌 장식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자신의 행위와 고통에 주어진 의미를 해독하기 위해 무엇보다 이미지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문자를 위시한 ‘선형 코드’의 등장이 텍스트들에 의해 이미지를 흡수하도록 만들었다면, 이제 첨단 ‘테크놀로지 코드’에 의해 새롭게 프로그래밍된 세계에서 우리는 TV 프로그램처럼 이미지가 다시금 문자를 대체하고 역사적 시간이 실종되는 상황을 경험하고 있다. 컴퓨터의 알고리즘이 계산적 사고의 기호들을 바탕으로 대체 현실을 합성해 투영된 세계에서 우리의 ‘자아’는 가상성들의 교차점으로서 스스로가 ‘디지털 연산’과 다를 바 없어진다. “우리는 주어진 객관적 세계의 주체들이 아니라 대안적 세계의 투영체이다.”
플루서는 이제 우리가 사는 집도 인간관계망의 중심으로 변모했다고 말한다. 지붕 위에는 안테나가, 벽을 관통하는 전화선이, 창문 대신 TV가, 문 대신 차고와 자동차가 자리 잡았다. 온전했던 집은 폐허가 돼 그 틈새로 소통의 바람이 불어 든다. 공공 공간도 방사형 및 네트워크형 구조의 채널들로서, TV 케이블을 통해 공공성이 사적 공간으로 침투한다. 이제는 집도 광장도 없고, 오로지 케이블의 뒤엉킴만 있을 뿐이다. 모든 정신적 요소 역시 다를 바 없는데, 인간은 더 이상 개인으로 볼 수 없으며, 오히려 조밀하게 분산된 입자로 간주돼야 마땅하다. 새로운 인간상을 규정하는 것은 관계의 얽힘이다. 이 네트워크의 실들은 생각·감정·의도 또는 통찰 등의 정보가 흐르는 통로로 볼 수 있다.
플루서는 본래부터 매개된 존재인 인류가 하릴없이 ‘코드’에 의존해야 했던 원초적 인간의 상태로 되돌아왔다고 말한다. 미디어·매체와 인간 소외의 관계는 실로 인류사의 본령이었던 셈이다. 변한 것은 미디어가 인간 소외를 극복하는 데 도움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인간을 극단적으로 소외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소위 ‘활자인간’도 엄중한 텍스트에 종속돼 구술 세계의 풍요로움, 즉 자연의 리듬을 시적으로 모방한 구어 표현의 풍성함과 온기를 잃어버렸었다. 소위 ‘지식인’ ‘먹물’들에 대한 경멸은 바로 이러한 소외를 지적한 것이 아니던가. 분명 인간은 미디어 없이는 한시도 버틸 수 없지만, 동시에 그로부터 소외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앞으로 우리는 새로운 미디어를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초래할 인간 소외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고 냉철하게 파국을 예방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