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가 정기검사를 받듯, 바다를 오가는 큰 배도 몇 년마다 조선소에 들어와 ‘건강검진’을 받는다. 그중 가장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 녹을 벗겨내고(표면처리) 페인트를 새로 입히는(도장) 일이다. 바닷물에 시달린 배의 페인트는 사람의 피부와 같다. 피부가 상하면 철판이 녹슬어 수명이 줄고 선체가 거칠어지면 물의 저항이 커져 기름도 더 든다.
이 일을 전문으로 하는 수리조선의 중심지가 바로 부산이다. 지금 부산 수리조선은 큰 기회와 위기를 동시에 맞고 있다. 미국 해군이 자국 군함 정비를 동맹국에 맡기기 시작했고, 그 시장만 연간 20조 원에 이른다. 올해 초에는 미 해군 군수지원함이 정비를 위해 영도조선소에 들어왔다. 세계 최고 수준의 고객이 부산의 문을 두드린 셈이다. 그런데 이 깐깐한 고객이 가장 엄격하게 따지는 것이 바로 도장 품질이다. 엔진을 아무리 잘 고쳐도 페인트가 몇 년 만에 들뜨면 다음 주문은 없다.
우리 현장은 여전히 사람 손에 의존한다. 작업자가 높은 비계에 올라 모래나 쇳가루를 고압으로 뿜어 녹을 벗기고 페인트를 뿌린다. 이때 엄청난 먼지와 냄새가 주변으로 퍼진다. 도심과 맞닿은 부산 수리조선소는 민원과 환경 규제에 묶여 작업 자체가 어려워지고 있다. 규제 때문에 작업장 허가조차 받기 어려워 대형선 정비가 동남아와 중국으로 넘어간다는 연구도 있다. 실제로 3만 t 이상 우리 대형 선박 상당수가 중국·싱가포르 등 해외에서 정비를 받는다. 고되고 위험한 일을 맡을 젊은 인력도 갈수록 줄고 있다.
경쟁사인 중국 저우산의 한 조선소는 녹 제거·도장 로봇을 대량으로 투입했다. 프랑스의 한 수리조선소는 세척부터 도장까지 해내는 자율 로봇 5대를 들여왔는데, 이 로봇은 페인트 두께를 설정대로 맞추고 작업용 물의 90%를 재활용한다. 미 해군 군함을 짓는 미국 HII도 올해 AI 로봇 기업과 손잡고 녹 제거·도장·검사 자동화에 나섰다. 일본에서는 24시간 가동되는 선박 탱크 도장 로봇이 개발됐다.
우리는 어떤가. 부산은 이제 막 자동화 블라스팅 장비 기술지도를 시작한 단계이고 작업환경 개선 지원은 기업당 최대 300만 원에 그친다. 경쟁국이 로봇과 AI로 ‘먼지 없는 도크’를 만들 때, 우리는 겨우 첫걸음을 떼고 있다. 현장의 절박함에 비해 대응은 너무 더디다. 규제는 갈수록 강해지고 숙련공은 떠나며, 고객은 더 깨끗하고 품질이 확실한 곳을 찾아간다. 어렵게 찾아온 미 해군 물량도, 우리 배의 정비 물량도 결국 다른 나라의 도크로 간다. 배 한 척이 들어오면 부품업체부터 식당·숙박업까지 지역 경제가 함께 움직인다. 배를 놓치면 일자리도 함께 떠난다.
해법은 분명하다. 먼지와 유해가스를 가둬 처리하는 밀폐형 설비, 사람 대신 위험한 작업을 맡는 표면처리·도장 로봇, 그리고 페인트 상태를 AI와 첨단 영상기술로 진단해 품질을 숫자로 입증하는 기술이 필요하다. 정부와 부산시가 공동 실증 시설과 장비 도입, 현장 인력 양성을 과감하게 지원해야 한다. 배의 피부를 지키는 기술은 부산 수리조선의 생존 기술이다. 지금이 골든타임이다. 몇 년 뒤 ‘그때 했어야 했다’는 후회를 남기지 않으려면 지금 시작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