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 이후 브레턴우즈 체제를 축으로 지난 80년간 이어온 자유무역 질서가 위기다. 미중 패권 경쟁과 이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지정학적 갈등 심화 속에서 미국 트럼프 정부는 경제적으로 자국 중심의 글로벌 가치사슬(GVC) 재배치에 혈안이다. 관세와 산업 보조금을 지렛대 삼아 반도체 등 핵심 제조업 생산 기반을 자국으로 유치하려는 미국의 통상 전략은 이제 우리 기업이나 정부도 거스를 수 없는 상수가 됐다.
파이낸셜타임스(FT) 분석에 따르면 미국의 2025년 실효관세율은 17.3%에 달하며, 이는 1930년대 악명 높은 ‘스무트-홀리 관세법(Smoot-Hawley Tariff Act)’ 이후 거의 한 세기 만에 최고 수준이다. 세계 최대 소비시장과 수입시장을 가진 미국 입장에서의 최적관세율(Optimal Tariff)인 약 20% 수준으로 수렴하는 가운데, 무역확장법 232조와 국제비상경제권한법(IEEPA) 등을 통한 상호관세 및 품목별 고율 관세 압박은 전 세계 기업들을 미국 내 투자로 유인하고 있다. 유럽 또한 최근 미국에 이어 대중 견제와 자국으로의 투자유치 대열에 참여하면서 앞으로 글로벌 가치사슬 재편의 시대가 더욱 가속화될 가능성이 높다.
이처럼 다급해 보이는 미국의 글로벌 가치사슬 재편정책과 유럽의 동참 배경에는 미국과 유럽 중심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중국의 부상을 견제할 수 있는 시기를 놓친 것에 있는 것 같다. 이미 2017년 중국 수출 규모는 2조 2800억 달러로 미국의 1조 5500억 달러 대비 1.47배 수준이었다. 1기 트럼프 행정부의 전방위적 견제에도 2024년 중국 수출은 3조 5800억 달러로 증가해 미국의 2조 700억 달러 대비 1.73배까지 격차가 벌어졌다. 향후에도 애플, 테슬라 등 미국의 기업들이 얽혀 있는 중국 중심의 제조업 네트워크와 일대일로를 통한 공급망 팽창은 단기간에 반전되기 어려워 보인다.
한편 이러한 거대한 지각변동 가운데 한국의 해외투자는 2000년대 중국과 베트남을 중심으로 저렴한 노동력을 활용한 ‘비용 절감·생산 분업형’이 주도하다가, 2010년대 이후부터는 미국, 유럽연합(EU), 멕시코 등으로 향하는 ‘시장 접근·현지 생산형’으로 주류(主流)가 이미 바뀌었다. 이 가운데 트럼프 정부의 높은 관세 등을 활용한 과격한 투자유치 정책은 한국기업들에게는 오히려 시장확대의 기회가 된 것이다. 그 결과 한국의 수출이 일본을 능가해 세계 4강에 진입하는 사상 초유의 성과를 얻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기업들의 대미 투자 확대가 국내나 부울경 지역에 남는 가치의 동반 확대가 지속화되는 것이 중요하다. 미국 현지에 얼마나 투자를 확대하고, 수출이 얼마나 늘었는가 보다, 이와 연관해 ‘국내와 지역에 남는 가치’가 얼마나 늘었는가가 관건이다.
이를 위해 첫째 ‘고부가가치 가치사슬 확대 전략’에 집중해야 한다. 제품 양산은 해외에서 수행하더라도, 마더 팩토리(Mother Factory)를 통한 시제품 검증, 핵심 공정 설계, 원천 R&D 및 지식재산권(IP) 창출 기능 등은 국내에서 지속할 수 있는 기반을 확대해야 한다. 또한 국내 핵심 인재의 경쟁력을 기반으로 고부가가치 기술 기반의 서비스 수출을 확대하는 전략에 각종 정책수단을 집중해야 한다. 특히 미국의 숙련 인력 부족과 공급망 붕괴로 기회가 열린 한국 조선업의 경우는 부산을 중심으로 국내에 기업 R&D 거점과 대학의 원천기술 및 인재의 글로벌 공급망 경쟁력을 강화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둘째, 동맹가치사슬(AVC, Ally Value Chain)을 강화해야 한다. 방산이나 전략자산 확보, 기술우위 유지 등에 있어 향후 신뢰할 수 있는 동맹국 중심의 가치사슬이 확대될 것이며, 이러한 전략적 동맹을 활용한 핵심 가치사슬의 국내 확보와 확대를 이어가야 할 것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사상 최대 수출 실적과 해외 투자 확대라는 외형적 ‘운수 좋은 날’에 취해, 정작 우리 내부의 산업과 교육 등의 보금자리가 죽어가는 우환이 없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