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가을 타세요?”
돌아보니 정원 평론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선득해진 날씨에 몸을 잔뜩 움츠린 채 하늘을 보고 있던 나는 그녀를 향해 미소 지었다. 가을을 타는지 안 타는지 물어보는 사람을 최근에는 거의 본 적 없었다.
“글쎄요, 저는 가을만 타는 게 아니라 봄 여름 가을 겨울, 다 타는 편이라서요.” 정원 평론가는 유난히 가을을 탄다고 했다. 그녀는 다른 계절보다 유독 가을을 탄다고 말하고는 가볍게 눈인사를 건넨 후 야외 공연장 쪽으로 걸어갔다.
나는 ‘가을을 타느냐’는 질문이 신선하게 느껴졌다. ‘외로우세요?’보다 덜 직접적이며 완곡하고 ‘밥 먹었어요?’보다 덜 식상하고 계절감이 느껴져서 좋았다. 가을을 탄다고 할 때 ‘타다’라는 말은 다른 말과 대체될 수 없는 매력이 있다. ‘타다’라는 동사의 사전적 의미는 “계절이나 기후, 감정, 분위기 등의 영향을 쉽게 받거나 그것에 민감하게 반응하다”이다. 추위나 더위를 타다, 부끄러움을 타다, 간지럼을 타다 등으로 쓰이는데, 이 단어는 외국어로 번역하기 어렵다고 한다.
작가는 모든 면에서 잘 타는 사람이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은 외로움과 부끄러움은 물론이고 타인의 감정을 잘 탄다. 작가는 남의 고통이나 불행, 처참한 상황에 예민하게 반응한다. 그들은 남의 슬픔에 예민하게 반응할 뿐만 아니라, 누구보다 깊이 공감하고 더불어 앓는다. 마치 남의 질병에 가장 깊숙이 전염되는 사람처럼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몸으로 탄다. 나는 아직 멀었다. 내가 옻을 타는 만큼 타인의 마음을 탈 수 있다면, 그 마음을 언어로 표현할 수 있다면, 나도 괜찮은 작가가 될 텐데….
각설하고, 나는 지금 책상 앞에 앉아 있다. 책상 위엔 자그마한 창문이 있다. 창문과 인접한 대나무숲, 숲이라고 하기엔 민망할 정도로 대나무가 듬성듬성하게 심어졌다.
이 대나무숲 너머엔 감나무가 두어 그루 있다. 대나무 숲과 감나무 사이에는 담이 있기 때문에 나는 저 감나무가 정확히 몇 그루인지 알 수 없고 감을 따거나 먹을 수 없다.
다만 감나무에 저토록 찬란한 빛깔의 대봉감들이 햇빛에 넘실거리며 익어가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커다란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어젯밤에 비 오고 바람 거셌는데 감들은 추락하지 않고 고스란히, 아니 더욱 선명한 가을빛을 담고 매달려 있는 게 신기하다. 감과 감나무는, 감나무와 감은 작은 꼭지 하나로 연결된 게 아니라 온몸으로 서로를 붙잡아주고 있는 것 같다. 아직 때가 아니라는 듯 쉽사리 서로의 손을 놓지 않는다.
어린 시절 우리 집 마당에도 큰 감나무가 있었는데, 나는 그 나무의 아름다움을 몰랐다. 감꽃이 떨어지고 감잎 지는 게 성가셨다. 부모님은 매일 싸우셨다. 이제 와서 나무와 나뭇잎, 빛나는 열매, 어둠 속에서 자라는 뿌리, 오래된 이런 게 눈에 자꾸 밟힌다. 나무 한 그루의 아름다움과 한 줄기 바람의 신성함에 눈물이 난다. 자연 한 조각에 비하면 나의 창작은 얼마나 비루하고 부질없는지.
“매일매일이 전쟁이었던 팔 년 전 가을이 생각난다/ 왜 아무도 나를 이 지옥에서 꺼내주지 않을까 원망했지만/ 그 지옥은 바로 나// 굼벵이 같은 터널을 빠져나오면 더 가늘고 긴/ 터널이 기다리고 있는 가을/ 가을은 갓길/ 갯벌이 자신의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스스로를 괴롭히면서/ 너는 또 얼마나 외로웠니/ 잎 하나 없이 서 있다가/ 바람 같은 것이 오면/ 유령 진동처럼 떨고 있는 가을 나무” -박판식 ‘가을 나무’ 부분-
박판식 시인은 팔 년 전 가을이 전쟁이며 지옥이었다고 한다. 내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스스로를 괴롭히며 동시에 자기 연민에 휩싸이며 가을이라는 갓길에 헐벗은 나무처럼 붙박혀 있었다.
누구에게나 그런 가을이 있겠지. 하지만 시인은 이번 시집 제목으로 말한다. “안 좋은 날이 좋은 날”이라고. 좋든 안 좋든 죽지 않고 매일을 살아내는 존재들은 가을을 타며 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