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부산메디클럽

[인문학 칼럼] 중세 고려의 권력 견제, 제도와 공론의 힘

권한남용 막는 공적 장치…비판·토론 허용 정치문화

백성의 비공식 여론 창구, 오늘날 되새길 만한 지혜

정은정 부경역사연구소 연구원

  • 정은정 부경역사연구소 연구원
  •  |   입력 : 2026-10-28 18:44:51
  •  |   본지 19면
  • 글자 크기 
  • 글씨 크게
  • 글씨 작게
‘권력기관 개혁과 견제’는 끊임없이 논쟁의 중심에 오르는 주제다. 검찰과 경찰, 법원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의 권한을 어떻게 나누고 통제할 것인지를 두고 의견은 첨예하게 갈린다. 때로는 제도의 실효성을 따지기보다 어느 진영이 주도권을 잡느냐는 정치적 대립이 앞서기도 한다. 권력을 가진 자가 그 권한을 남용하지 않도록 어떻게 견제할 것인가, 중세 고려의 정치 현장에서도 중요한 과제였다.

고려에 현대적 의미의 삼권분립이 존재했던 건 아니다. 그런데도 고려에는 국왕과 관료의 정치 행위를 비판하고, 부당한 결정을 바로잡으며, 공직자의 비위를 규찰하는 제도적 장치가 있었다. 그 중심에 대간(臺諫)이 있었다.

대간은 관료를 감찰하고 탄핵하는 어사대의 대관(臺官)과 국왕에게 간언하는 중서문하성 낭사의 간관(諫官)을 아울러 부르는 말이다. 성종 대에는 당·송의 제도를 참고해 감찰기구를 정비하고 간관의 기능을 확대했다. 문종 대에는 대간 직제와 정원을 정비했다. 대간은 국왕의 잘못을 지적하는 간쟁(諫諍), 부당한 명령을 되돌리도록 요구하는 봉박(封駁), 관리 임명에 대한 심사인 서경(署經), 관료의 비위를 살피는 규찰과 탄핵을 맡았다. 이는 국왕이 국정 운영의 중심이라는 원칙을 인정하면서도 권한의 행사가 늘 정당한 것은 아니라는 문제의식을 제도 안에 담은 것이다.

성종 원년(982) 5품 이상 관리에게 국정의 잘잘못에 관한 의견을 올리도록 했다. 최승로는 이에 응해 시무 28조를 올려 국가 운영의 방향을 제시했다. 선대 국왕들의 정치를 평가하면서 지나친 불교 행사와 국가 재정 낭비를 비판했다. 지방관을 파견해 지방 세력의 횡포로부터 백성을 보호해야 한다는 건의도 했다. 통치자의 업적을 무조건 지지하는 대신에, 국왕의 정치도 평가와 비판의 대상이었다. 성종은 최승로가 제기한 건의 상당 부분을 받아들였다.

관리 임명에 대간의 심사를 거치도록 한 서경 제도 역시 인사권을 둘러싼 중요한 견제 장치였다. 고려에서는 원칙적으로 1품부터 9품까지 관리의 임명에 서경이 적용됐다. 국왕이 임명을 재가했더라도 대간이 심사한 뒤 서명하지 않으면 관직에 나아갈 수 없었다. 심사 과정에서는 임명 대상자의 재능과 행실, 결격 사유를 꼼꼼히 살폈다. 인사청문회나 국회 임명·동의 절차 같은 제도는 아니나, 인사권자의 결정만으로 임명이 완결되지 않도록 별도의 심사 관문을 둔 것이다.

공직을 사익의 수단으로 삼거나 직무상 권한을 부당하게 행사하는 행위는 탄핵 대상이었다. 덕종 원년(1031)에 어사대가 왕희걸 유백인 최복규 이응년의 관직을 박탈했다. 이들이 서경(평양)에 파견되던 중 토지를 구하고 재산을 늘렸다는 혐의 때문이었다. 예종 7년(1112) 간관들이 국고 낭비를 이유로 천수사 증축 중지를 상소했다. 국왕은 간관의 건의에 천수사 공사를 즉각 중단했다. 왕권에 반하는 세력의 견해도 적극 수렴하여 정책적으로 포용하는 국왕의 유연한 자세를 엿볼 수 있다.

고려의 제도에서 비판과 견제의 통로는 대간 같은 공적 장치만이 아니었다. 시의(時議)와 세평(世評), 곧 당대의 정치적 논의와 사회적 평판도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시의는 특정 정책이나 인물에 대한 당시의 공적 논의이다. 세평은 인물의 행실과 도덕성, 정치적 처신에 대한 사회적 평가를 뜻한다. ‘고려사’ ‘고려사절요’에는 당시 사람들이 이를 비웃었다(시인기지·時人譏之)거나, 세상의 논의가 이를 비판했다(물의비지·物議非之)는 표현이 등장한다. 시의·세평에 따르면 청렴하고 강직하며 백성을 배려하는 관리는 긍정적 평가를 받았다. 탐욕과 사치, 직무 태만은 비판거리였다. 공식적인 정치 공간에 접근하기 어려운 백성도 불만과 비판을 소문 익명서 벽서 참언과 같은 방식으로 드러냈다. 비공식 여론은 권력의 부당함을 드러내는 수단이지만, 자칫 근거 없는 뜬소문과 정치적 선동의 부정적 통로일 수 있었다.

결국 견제기관을 설치하는 것만으로 권력의 남용을 막긴 어려웠다. 제도가 실제로 작동할 수 있는 조건과 비판을 받아들이는 정치문화가 함께 뒷받침돼야 했다.

이제 되돌려 지금의 권력 견제와 개혁을 짚어본다면 검찰 권한 조정, 공수처 운운 모두 권력의 집중과 남용을 막기 위한 고민에서 출발한다. 권력기관 견제와 개혁의 핵심은 어느 기관의 권한을 더 키울 것인가에만 있지 않다.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 누구든 행위가 공적인 평가와 감시를 피할 수 없도록 만드는 데 있겠다.

권력은 인간의 선의를 믿고 맡겨둘 대상이 아닌, 언제든 남용될 수 있다는 전제 아래 통제 장치를 두어야 할 대상이다. 독주 제어만큼 중요한 건 권력이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갈 때 멈춰 세우는 일이다. 대간·시의·세평의 공식·비공식 여론 창구에서, 반대 의견도 수용하려 했던 고려의 권력·견제·소통의 문제를 재음미해야겠다.
ⓒ국제신문(www.kookj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국제신문 뉴스레터
국제신문 네이버 뉴스스탠드 구독하기
국제신문 네이버 구독하기
뭐라노 뉴스

 많이 본 뉴스RSS

  1. 1문 前 대통령 거제 생가 복원키로
  2. 2신세계, 센텀 롯데百 인수…쇼핑·문화·관광 복합타운 만든다(종합)
  3. 3신세계 야외주차장도 복합개발 속도…센텀 유통지형 요동
  4. 4팔만대장경 다시 판각…해인사 50년 대장정
  5. 5“영도 절영초 통폐합 추진 중단하라”
  6. 6고리원전에 가짜 베어링 납품 업체들, 1년째 수사 표류
  7. 7부산시, 쿠팡 등 3곳 1630억 투자 유치
  8. 8“국제신문 살리는 게 지역 민주주의 지키는 일”
  9. 9행사 한창인데 벡스코 정전…전력관리체계 도마(종합)
  10. 10김해 시내버스 개편…장유 등 23대 증차
  1. 1“영도 절영초 통폐합 추진 중단하라”
  2. 2“능인, 경영능력에 의문” 부산국힘 내주 지원안 머리 맞댄다
  3. 3국힘 부정선거론 다시 띄우기…민주 “선동에 열중” 비난
  4. 4李 비판 유시민에 김민석 “대응 불필요”
  5. 5송파 247만 장 검증, 신분확인·촬영요구로 시작부터 차질(종합)
  6. 6대한항공 말흐리기…실체없는 통합LCC 부산 허브
  7. 7국민의힘 곽규택 의원 등 동구 주요 당직자, 북항 돔구장 정부 공모 참여 환영
  8. 8[뉴스 분석] 종교인·언론사주가 국회 권위 훼손…도덕성 논란까지
  9. 9李 대통령 지지율 2%p 오른 46%…조희대 탄핵 반대 45%
  10. 10부울경 광역의회 협력강화 선언 “미래산업 함께 육성”
  1. 1신세계, 센텀 롯데百 인수…쇼핑·문화·관광 복합타운 만든다(종합)
  2. 2신세계 야외주차장도 복합개발 속도…센텀 유통지형 요동
  3. 3부산시, 쿠팡 등 3곳 1630억 투자 유치
  4. 4행사 한창인데 벡스코 정전…전력관리체계 도마(종합)
  5. 5미분양·빈집 누적…부산 안서도 주택 위기 제각각
  6. 6삼성전자 분기 영업익 107조 역대 최대…반도체로만 106조(종합)
  7. 7롯데, 영도대교 복원 인연 축제로 잇는다
  8. 8AI드론으로 참치 찾는 선박 부산 출항
  9. 9가계대출 금리 5% 턱밑…고정형 주담대 사상 첫 5% 뚫어
  10. 10‘덕후 천국’ 부산에 떴다…롯데百 전국 첫 IP 전문관
  1. 1문 前 대통령 거제 생가 복원키로
  2. 2팔만대장경 다시 판각…해인사 50년 대장정
  3. 3고리원전에 가짜 베어링 납품 업체들, 1년째 수사 표류
  4. 4“국제신문 살리는 게 지역 민주주의 지키는 일”
  5. 5김해 시내버스 개편…장유 등 23대 증차
  6. 6본사 비대위·퇴직자, 지광 고소…실질경영자에 ‘체불 책임’ 추궁
  7. 7기말고사에 EBS 유사 문항, 처음 아니었다
  8. 8“대화 거부한 건 대주주…당당하면 왜 국회서 소명 안 했나”
  9. 9오늘의 날씨- 2026년 10월 30일
  10. 10검증 체계 없는 유가보조금…줄줄 샌다
  1. 1괜찮을까…모레노호, ‘96라인’·손흥민 모두 품었다
  2. 2마침내…밀워키, 월드시리즈 첫 우승(종합)
  3. 3“AG 환희 잊고…리그 첫 경기부터 승수쌓기 총력”
  4. 4여자프로농구 절반이 女감독
  5. 5롯데 수석코치 허문회, 2군 감독 박승민
  6. 6모레노, 은퇴소동 ‘96라인’ 달랜다…대표팀 내홍 풀까
  7. 7부산시대 2년차 읏맨 “홈팬 응원에 성적으로 보답”
  8. 8밀워키, 창단 58년 만에 WS 우승…5차전서 4-1로 탬파베이 제압
  9. 9경남 생활체육 대축전 30일 개막…3일간 31개 종목 열전
  10. 10롯데, 공격서 수비로 중심 이동…주전 새판짜기 예고
우리은행
10대 부산시의회 상임위 들여다보기
“학교 통폐합 지역 맞춤형으로 접근”
10대 부산시의회 상임위 들여다보기
해운기업 유치, 해사법원 신설 “해양수도 부산 경쟁력 키울 것”
강동진의 도시이야기 [전체보기]
바흐를 찾아간 나, 한국을 꿈꾸는 그녀
세계유산위원회, 부산의 시간을 세계와 나누다
경제프리즘 [전체보기]
소비 아닌 문화 생산 주체 오페라하우스
한국 갯벌의 2단계 확대 등재 의미
과학에세이 [전체보기]
지역이 기획, 국가가 지원하는 R&D 시대 열자
진짜 질문의 시작
국제칼럼 [전체보기]
부캉이에게 부끄러운 북항 재개발 민낯
부산 관광, 마냥 좋기만 할까
기고 [전체보기]
‘성범죄 취업제한’의 사각지대
‘2028 세계디자인수도 부산’의 과제
기자수첩 [전체보기]
금고 이사장 전횡, 지금도 진행중
엘리트 자평해온 市 공무원…생중계 회의서 능력 입증을
김준희의 클래식 인사이트 [전체보기]
여름의 끝자락, 브람스
여름날의 애상, 왈츠
김지윤의 우리음악 이야기 [전체보기]
다대포에서 만난 퇴계 이황
세종시대 음악이 전해진 이유
뉴스와 현장 [전체보기]
‘탈서울’ 안 된다던 원안위, 세종행에 왜 침묵하나
AX·반도체 전시회 5개 동시에 열렸는데…
도청도설 [전체보기]
클릭으로 여는 독도
지긋지긋한 론스타
독자 투고 [전체보기]
새로운 시작 ‘황혼 이혼’
무료 화장실 깨끗하게 쓰자
메디칼럼 [전체보기]
개정 응급의료법이 ‘미수용 방지법’?
25년을 간직한 리플렛 세 장
목지수의 도시브랜드 산책 [전체보기]
랜드마크 시스템의 시대
북항 돔구장에서 야구 보며 사우나를
박지욱의 뇌력이 매력 [전체보기]
건망증, 이렇게 잡자
운동으로 해마를 키우자
박진희의 컬처 픽 [전체보기]
‘부캉이’ 스펙터클에서 공존으로
부산 문화정책, 지금 필요한 선택
사설 [전체보기]
국회 출석 거부하며 장외 사실호도 일삼는 지광
AI 해킹 범죄 고도화…수사 공백 해소 시급하다
세상읽기 [전체보기]
반복된 일상에서 마음의 여유를 찾는 법
한국 경제 떠받치는 중장년, 이제 다시 봐야
안재철의 연결하는 공간 [전체보기]
지구와 도시의 연결을 묻다
해양수도 부산, ‘제3의 경계 공간’
엄길청의 문전성시 [전체보기]
말과 현실이 너무 다른 부산
반도체와 부산
이보성의 미술 현장 산책 [전체보기]
두 미술관, 각자의 역할을 묻다
시장이 강해진 것일까, 비엔날레가 약해진 것일까
이상이 칼럼 [전체보기]
복지의 ‘필요 원칙’과 포퓰리즘
보건의료에서 지방정부 역할과 ‘정책 의료’
이정구의 맛과 건강 [전체보기]
미식과 오래 씹기
이제명의 오션 드림 [전체보기]
기다림에도 비용이 든다
광복 81년, 다음은 바다의 산업 주권
이홍의 세상현미경 [전체보기]
대규모 대미 투자, 기회인가 위협인가
국제질서의 지각변동과 한국의 성장경로
정쾌호의 부동산 탐구생활 [전체보기]
부산 아파트 10년, 이중 양극화와 위상 추락
미분양의 경고, 지방 맞춤 ‘출구전략’ 서둘러야
주재민의 명당을 찾아서 [전체보기]
사람은 갔어도 명당은 남아 있다
조선 8대 명당 중 하나인 정문도 묘
최태호의 와인 한 잔 [전체보기]
와인은 어떻게 마음에 남는가
추석의 식탁, 가족을 잇는 와인
특별기고 [전체보기]
‘해양수도 부산’ 토대부터 바로 놓아야
당론 따를지 역사 따를지 양심의 선택을
하순봉의 음악이야기 [전체보기]
박자와 기보
국민악파
황정수의 그림산책 [전체보기]
이대원의 ‘온정리 풍경’
유영국의 1957년 작 ‘사람’
CEO 칼럼 [전체보기]
시민 주거안정에서 지역경제 활성화까지
청년 떠나는 지방, 수도권 인구 분산해야
  • 국제신문 골프대회
  • 맘편한 부산
  • 부산국제마라톤
  • BNK생명나눔챌린지
  • 유콘서트
걷고 싶은 부산 그린워킹 홈페이지
국제신문 대관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