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의 투자계획서에는 사업을 시작하는 데 드는 비용이 촘촘히 적혀 있다. 그러나 결정을 미뤘을 때 잃는 것은 좀처럼 같은 무게로 계산되지 않는다. 현재 사업이 돈을 벌고 있다면 기다림은 안전한 선택처럼 보인다. 다만 산업의 전환기에는 이 계산법이 달라져야 한다. 뒤늦게 시장에 진입하는 위험 역시 투자 실패의 위험만큼 경영의 장부에 올려야 하기 때문이다. 더 나은 정보를 얻기 위한 기다림이라면, 무엇을 언제까지 확인할지 정해야 한다.
코닥은 디지털카메라를 일찍 개발했고 디지털 사업에도 투자했다. 그럼에도 필름 시대의 수익구조를 대체할 지속 가능한 사업모델을 만드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노키아는 휴대전화를 잘 만드는 능력을 소프트웨어와 서비스 생태계의 경쟁력으로 연결하지 못했다. 두 기업의 부침(浮沈)을 결단력 부족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하지만 기술을 보유하는 일과 변화한 시장에서 수익을 만드는 일이 별개라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조선해양산업의 친환경 전환도 이 질문 앞에 서 있다. 액화천연가스(LNG) 메탄올 암모니아 수소와 배터리 추진 가운데 어느 특정된 하나가 모든 선박의 정답이 되기는 어렵다. 선종과 항로, 운항 거리, 연료 공급 여건에 따라 적합한 선택이 달라진다. 선주의 비용 계산도 건조 가격에만 머물지 않는다. 연료비와 유지비, 배출 규제에 따른 비용, 향후 개조비까지 합친 선박의 생애 비용이 투자 판단의 기준이 돼야 한다. 연료 가격과 탄소 가격의 변동도 반영해야 한다.
규제의 방향과 시행 속도도 구분해서 읽어야 한다. 국제해사기구(IMO)는 2023년 전략에서 2050년께 국제해운의 온실가스 순배출 제로를 목표로 삼았다. 이를 구체화할 넷제로(Net-Zero) 프레임워크의 채택 논의는 지연됐지만, 유럽연합의 해운 배출권거래제와 선박연료 규제는 이미 시행되고 있다. 국제적 합의가 늦어진다고 모든 시장의 전환 시계가 함께 멈추는 것은 아니다. 기업은 자신이 진출할 항로와 고객에게 적용되는 조건부터 계산해야 한다.
연료의 이름만으로 친환경성을 판단해서도 안 된다. 연료 생산과 운송, 선박에서의 사용까지 포함한 ‘전 과정 배출량’을 봐야 한다. LNG는 연소 과정의 이산화탄소뿐만 아니라 생산·공급 과정의 메탄 누출과 엔진에서 연소되지 않고 나오는 메탄까지 고려해야 한다. 메탄올과 암모니아, 수소도 생산 방식에 따라 감축 효과가 달라진다. 실제 감축 성능과 안전성, 조달 가능성을 함께 검증해야 기술의 사업적 가치를 판단할 수 있다.
이런 판단의 근거를 쌓는 선행 투자가 액화수소 운송 실증선이다. 실제 운항 경험은 안전기준을 구체화하는 데도 쓰인다. 일본선급은 최근 개정한 액화수소 운반선 지침에 실증선의 건조·운항 경험을 반영했다고 밝혔다. 실증 자료는 후속 선박의 설계를 보완하고 선급의 검토를 뒷받침하며, 운항·정비 절차를 개선하는 근거가 된다. 우리 기자재가 실제 해상 환경에서 성능을 입증하고 사용 이력을 쌓는 과정도 중요하다. 국산 기술의 가능성을 고객이 판단할 수 있는 자료로 제시해야 시장 진입의 문이 열린다.
실증선 한 척의 성공만으로 대형 상용선의 경제성이 입증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대형화에 따른 구조와 열관리 문제를 면밀하게 검증하고, 수소 공급가격과 운송 수요도 따져야 한다. 그렇기에 초기 실증과 대규모 상업 투자는 단계적으로 연결해야 한다. 어떤 성능이 확인되면 확대할 것인지, 어떤 문제가 남으면 설계를 수정할 것인지 미리 정해야 한다. 실증의 가치는 더 큰 투자를 하기 전에 문제를 발견하고 고칠 수 있다는 데 있다.
부산·경남 조선해양 산업생태계에도 같은 원칙이 필요하다. 중소 기자재 기업이 감당하기 어려운 시험·인증은 공동 기반으로 지원하고, 실증을 통해 축적한 운항·정비·성능 자료는 다음 설계에 반영해야 한다. 정부의 지원도 개발 과제 수나 시제품 완성에 그치지 않고 검증된 성능이 실제 발주로 이어지는 과정을 살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중앙정부와 지자체의 투자는 민간의 결단을 뒷받침하는 토대다. 중앙정부는 실증선 건조와 지속적 운항·검증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고, 지자체는 항만과 연계한 시험시설과 전문인력 양성에 투자해야 한다. 공공이 초기 실증의 비용과 위험을 분담하면 기업의 후속 투자 부담도 낮아진다. 검증 성과를 점검하며 여러 해에 걸쳐 이어가는 공공투자가 지역의 기술을 산업 경쟁력으로 키운다.
바다는 결정을 재촉하지 않는다. 하지만 시장도 경험이 쌓일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는다. 오늘의 실증으로 확인할 문제를 내일의 투자에서 맞닥뜨리면 그 대가는 훨씬 더 커질 수 있다.
신중함은 결정을 미루는 시간이 아니라 결정에 필요한 근거를 쌓는 과정이어야 한다. 한국 조선산업의 다음 경쟁력은 어느 연료의 승리를 예언하느냐보다 무엇을 확인하고 언제 투자할지를 스스로 정하는 능력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