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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곡가 에드워드 엘가. |
얼마 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임연정 감독의 다큐멘터리 ‘리커버리’를 프리미어 상영으로 보았다. 영화가 끝난 뒤 진행된 관객과의 대화에서는 공감과 위로를 받은 관객들의 이야기들이 이어졌다. 나도 질문 기회를 얻었다. 영화에는 감독의 여러 ‘처음’이 담겨 있었다. 주짓수를 배우고 서핑을 경험하면서, 자신의 기억을 카메라 앞에 꺼내 놓는 일까지. 나는 그 모든 처음을 함께 볼 수 있어 영광이라고 말한 뒤, 지금도 새롭게 도전하고 있는 일이 있는지 물었다. 감독의 답변은 ‘평범한 일상을 계속 살아가고 싶다’였다. 꽤 오랫동안 자신과 세상에 대한 도전을 멈추지 않았던 그가 바라는 평범한 하루는, 어쩌면 작은 도전들이 전제된 평온한 일상이 아닐까?
‘리커버리’는 ‘여자가 나오는 액션영화’를 찍고 싶었던 임연정 감독의 도전과 성취의 일기를 담은 일종의 셀프 다큐멘터리다. 영화 초반의 다이나믹한 움직임은 시간이 흐르면서 내면의 어두운 기억으로 넘어간다. 애니메이션으로 구성한 장면들은 말과 실사 이미지만으로는 전달하기 어려운 무거운 감정을 오히려 간결하게 구현했다.
땀방울이 흐르는 현재와 눈물이 흘렀을 과거가 교차되며, 스스로 액션영화의 주체가 되어 성장하는 감독 자신의 모습을 꽤 섬세하게 담았다. 아마추어 주짓수 대회를 준비하는 장면을 보며 복잡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오갔다. 낯선 상황에 내던져질 그의 모습을 응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도전이 너무 쉽게 성취되지 않기를 바랐다. 경기장 밖의 응원하던 그의 동료들 시선에서 이미 내가 시합을 뛰는 주체가 된듯했다.
꼭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순간이 아니더라도 우리의 삶은 작은 도전과 함께 크고 작은 실패와 성취가 이어진다. 계획대로 되지 않아 마음이 무거운 날이 사실은 더 많다. 이런 일상에는 앞으로 나아갈 힘만큼이나 잠시 쉬어 갈 마음의 여유가 필요해진다. 애쓴 자신을 다독이며, 멈추지 않을, 뒤돌아가지 않을 용기를 얻는 시간. 그런 시간을 위한 곡이 있다.
‘사랑의 인사’와 ‘위풍당당 행진곡’ 그리고 첼로협주곡 등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영국 작곡가 에드워드 엘가의 ‘현을 위한 세레나데 작품 20’을 들어보자. 세 악장으로 이루어진 짧은 현악 합주곡인 이 곡은 엘가가 음악가로서 큰 명성을 얻기 전 작곡되었다. 첫 악장에서는 유연한 리듬 위로 서정적인 선율이 펼쳐지고, 조금 더 정적인 2악장에서는 길게 이어지는 선율과 섬세한 화성의 변화가 차분한 분위기를 이끌어간다. 마지막 악장은 1악장의 음악적 요소들을 회상하기도 하며 무게감 있는 선율로 마음을 적신다.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더블베이스의 현악기로만 연주되는 곡이지만 이들이 빚어내는 소리는 놀라울 만큼 풍성하다. 각 악기의 음색이 섬세하게 얽히며 만들어 내는 두터운 질감은 현악 합주만의 매력이다. 특히 3악장에서는 성부 간의 긴밀한 짜임새와 더불어 현악기 특유의 깊고 밀도 높은 음향이 절정으로 이어진다. 클라이맥스의 묵직한 긴장감과 곡이 끝나기 직전 긍정적인 해결감을 주는 순간은 더없이 순수하게 아름답다.
이 글을 쓰고 있을 무렵, 임연정 감독의 ‘리커버리’가 부산국제영화제 다큐멘터리 부문 관객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접했다. 영화를 가장 먼저 만난 관객으로서 무척 기뻤다. 그리고 엘가의 세레나데를 다시 들었다. 새로운 곡을 익히고 무대에 서는 도전을 평생 이어온 나에게도 이 곡은 지친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나아갈 여유를 건네는 힘이 되었다.
작곡가와 연주자, 배우와 감독. 예술가들은 상상 도전하고 기다리며, 오랜 인내의 시간을 거쳐 하나의 작품을 완성한다. 이런 수많은 시간을 지나온 작품이 관객과 청중을 만나는 순간을 나는 사랑한다. 내가 클래식 음악만큼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다. 이번 부산국제영화제는 좋은 작품과 사람들을 만나는 기쁨에 더해 오래도록 간직할 추억을 선물해 주었다. 영화와 음악, 그리고 부산에서의 만남은 엘가의 세레나데처럼 내게 회복을 위한 다정한 위로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