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해운대에 가면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1991년 9월 16일, 처음 한국에 왔던 날이다. 아름다운 백사장에는 리어카가 줄지어 서 있었고, 고구마 과자를 팔기도 했다. 물론 하늘을 가릴 듯한 고층 아파트는 없었다. 아침에 후쿠오카를 출발해 비틀호를 타고 현해탄을 가르며 두 시간 반 남짓 달렸다. 생각보다 싱거운 항해였다. 육지가 보이자 머릿속에서는 ‘돌아와요 부산항에’의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1980년대 일본에서 조용필이 불러 크게 히트한 명곡이었다. 노랫말에 나오는 오륙도는 놓쳐 버렸지만, 갈매기들이 많이 울었던 것만은 분명했다.
나는 반년 배운 한국어로 터미널 안내소에서 “관광 지도를 주세요”라고 말해 봤다. 안내 직원은 일본어로 “여기 있습니다”며 일본어 지도를 건네줬다. ‘한국어밖에 통하지 않겠지’ 하고 잔뜩 긴장했던 나는 맥이 빠졌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이 놓였다. 맑은 가을 하늘 아래 태극기가 펄럭였다. 한국과 북한의 유엔 동시 가입이 결정돼 축하 분위기가 감돌았다.
처음 먹은 점심은 설렁탕이었다. 식당 손님들이 먹는 것을 보니 국물이 하얘서 안심하고 주문했다. 빨갛고 매운 음식에 아직 익숙하지 않았다. 일본에서는 재일동포들이 고깃집을 운영하고 있었기에, 나는 한국인들이 매일 고기를 먹는다고 지레짐작했다. 당시 대부분의 일본인이 한국에 관해 알고 있는 것도 그 정도였다.
우선 묵을 곳부터 찾아야 했다. 한 호텔에 들어가 한국어로 “빈방 있습니까?” 물어봤다. 발음이 서툴렀던지 말이 통하지 않았다. 근처에서 동아일보 지국 간판을 발견했다. 동아일보와 내가 있었던 아사히신문은 제휴 관계였다. 기자로 보이는 남성에게 영어로 호텔을 물으니, 그는 “역 앞에 가면 있습니다”고 알려줬다. 부산역 앞에 가니 아리랑호텔이 눈에 띄었다. 체크인 후 밤에는 자갈치시장에서 회를 안주 삼아 진로를 마셨다. 달콤하고 마시기 편했다. 두 병이나 마셨던 것 같다. 다음 날 새마을호가 흔들릴 때마다 숙취에 시달리며 서울로 향했다. 그 뒤 1년 동안 나는 신문사의 어학연수생으로 연세대 한국어학당에서 한국말을 기초부터 배웠다.
당시에는 ‘한류’라는 말 자체가 없었다. 일본에 알려진 가수도 조용필 계은숙 김연자 정도였다. 88서울올림픽이 열리기 전부터 어느 일본 레코드 회사는 ‘엔카(演歌)의 뿌리는 한국에 있다’는 홍보 문구로 한국 가수들을 소개한 적이 있다. 일본에서 접할 수 있는 한국 대중문화는 그 정도였다.
학생 시절 도쿄에서 밤늦게 라디오를 켜면 AM으로도 한국의 KBS 방송이 들려왔다. 한국어를 듣다 보면 간간이 ‘대통령’이나 ‘고속도로’처럼 일본어와 비슷한 발음이 들렸다. 참 신기한 언어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이웃 나라의 말’과의 첫 만남이었다. ‘언젠가 공부해 보고 싶다’ 그런 마음이 싹트기도 했지만, ‘그래도 우선은 영어부터 해야지’ 생각하고는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았다. 지금은 일본에서 특히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한국어가 인기를 얻고 있지만, 당시 한국어를 배우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한국의 도자기, 민주화 운동, 재일동포의 인권 문제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배웠다. 북한의 사회주의를 동경하는 일본인도 있었다. ‘이웃 나라’인데도 멀게 느껴졌다.
그런 한국이 고난을 거쳐 민주주의 국가가 됐다. 현지에서 생활해 보고 싶었던 나는 사내연수제도에 지원했다. 국제부에서 오래 일한 나는 어렵게 한국어를 배웠지만 서울 특파원이 될 기회는 없었다. 재작년에 신문사를 정년퇴직했고, 좋은 인연이 닿아 동서대 강단에 서게 됐다. 마침내 ‘부산 특파원’이 된 셈이다.
그런데 김해공항과 도쿄 하네다공항을 잇는 직항편이 없어 나리타공항에서 비행기를 타야 한다. 도쿄 서쪽 교외에 있는 집에서 나리타까지는 세 시간 가까이 걸린다. 정작 나리타에서 부산까지는 두 시간 남짓인데 말이다. 부산에서 들리는 일본어는 대부분 오사카와 후쿠오카 사투리다. 직항편이 없으니 도쿄에서 오는 사람이 적은 모양이다. 부산에는 바다도 있고 산도 있으며, 회도 고기도 신선하다. 서울보다 도시가 아담하게 모여 있어 어디든 가기 편하다. 물가도 비교적 저렴하다. 나는 부산이 지닌 매력을 일본에 있는 친구들에게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