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단종이 손위(遜位·임금 자리를 내놓음)할 때 안평대군 이용은 즉각 죽임을 당했고, 금성대군 이유는 순흥으로 귀양 가서 격문을 돌리고 군사를 일으키려다가, 거사를 앞두고 고발한 자가 있어 역시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이로 인해 순흥이란 고을을 폐해 없애게 되었는데, 그 고을 백성이 이렇게 노래했다. “昔端宗之遜位(석단종지손위), 安平大君瑢被誅(안평대군용피주), 錦城大君瑜謫順興(금성대군유적순흥), 傳檄起兵未發而有告者亦誅(전격기병미발이유고자역주). 扵是革廢順興府(어시혁폐순흥부), 居民謡曰(거민요왈)”
압각이 다시 살아나면 순흥이 회복되고(鴨脚復生順興復·압각부생순흥부)
순흥이 회복되면 노산도 복위된다(順興復魯山復位·순흥부노산부위)
위 글은 성호 이익(1681~1763)의 문집인 ‘성호사설’ 권6 ‘만물문(萬物門)’에 실린 ‘입각(鴨脚·은행나무)’이란 제목의 글이다. 수양대군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할 때 형제인 안평대군과 금성대군도 죽였다. 금성대군이 순흥에서 거사하려다 실패했으므로 세조는 순흥이란 고을을 폐했다. 그러자 그 고을 백성 사이에서 위의 노래가 불리어졌다는 것이다.
이어지는 글을 보면, 노래가 불린 지 230년이 넘어서 순흥부 동쪽에서 은행나무가 갑자가 절로 자라나기 시작했고, 얼마 되지 않아 순흥(경북 영풍군 순흥면)에 부(府)를 다시 설치하게 되었다. 또한 이때(숙종 시기) 신규(申奎)란 자가 단종은 복위돼야 한다는 상소를 올리자 조정의 신하도 모두 찬동하게 됐다. 그래서 옛날 순흥 백성들이 노래한 말이 과연 들어맞았다고 했다. 이익이 순흥에 갔을 때 그 지방 사람들이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을 직접 들었다고 했다.
금성대군의 죽음을 애도하고, 순흥부와 단종의 복권을 바랐던 민중이 유포한 노래였다. 이처럼 백성이 현실에 대한 어려움이나 정치에 대한 불만을 음악적 언어로 표현한 것을 요(謠)라고 한다. 아이 노래 형식이면 동요(童謠)라 일컬었다. 우리가 아는 ‘서동요’(삼국유사 무왕조)를 비롯해 나라가 혼란할 때마다 수많은 요가 유행했다.
시인·고전인문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