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에서 즐길 것은 단지 솔과 대뿐이니(此中可喜只松篁·차중가희지송황)/ 늦은 철 향기 내는 국화는 더구나 없네.(無復黃花晩送香·무복황화만송향)/ 억지로 동쪽 울타리 가을 한 폭 담아서(强畵東籬秋一幅·강화동리추일폭)/ 바닷가에서 이를 보고 중양절을 즐기네.(海天擬對作重陽·해천의대작중양)
위 시는 조선 후기 중인 화가인 우봉(又峰) 조희룡(趙熙龍·1789~1866)의 ‘조희룡전집’에 나온다. 제목이 좀 길다. ‘신해년 8월 20일 임자도로 유배길을 떠났다. 눈으로 본 것과 마음으로 기억한 것을 모두 시로 적어 근심과 답답함을 풀었다.(辛亥八月二十日作荏島之役凡目之所覩心之所記俱以成詩聊道愁鬱·신해팔월이십일작임도지역범목지소도심지소기구이성시료도수울)’
추사 김정희는 제주도 유배 이후 1851년 영의정 권돈인의 일에 연루돼 다시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됐다. 추사의 제자였던 조희룡도 이와 관련해 전남 신안군 임자면 소속인 임자도로 유배됐다. 이 시는 임자도에서 지었다. 선비는 이날 국화전에 국화주를 마시며 시를 지었다. 조희룡이 임자도에 유배 중일 때 국화가 없었던 모양이다. 그리하여 도연명이 국화 핀 동쪽 울타리에 선 모습을 그려, 그것으로 중양절을 즐겼다. 시 글씨 그림에 모두 뛰어났던 그는 신분은 낮았지만 헌종과 김정희로부터 상당한 인정을 받았다. 조희룡이 회갑을 맞자 헌종이 축하하며 벼루를 하사할 정도였다. 58세에는 헌종의 명을 받아 금강산 명승지를 그리기도 했다.
조희룡은 매화를 좋아하여 자주 그림에 담았다. 그의 그림 가운데 가장 수작으로 평가되는 작품 역시 매화가 소재인 ‘매화서옥도(梅花書屋圖)’와 ‘홍매대련(紅梅對聯)’이다. 매화 그림을 이야기할 때 청나라에서는 금농을, 조선에서는 조희룡을 맨 앞에 둔다.
조희룡은 원래 매화와 난초를 좋아했지만, 임자도에 살면서 대나무를 즐겨 그렸다. 1853년 3월 18일 드디어 섬을 빠져나갔다. 이때 65세였다. 그는 유배 중에도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여 기량이 더 완숙했다는 평을 받는다. 열악한 환경의 적거지에서도 절망하지 않은 예술혼이 돋보인다.
조해훈 시인·고전인문학자·목압서사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