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드라미 오뚝하고 봉선화 기울었는데(鷄冠逈立鳳仙橫·계관형립봉선횡) / 표주박 넝쿨엔 붉은 가지가 얽혀 있네.(瓠蔓笳莖紫翠縈·호만가경자취영) / 한 떼의 고추잠자리 왔다 가니(一陣朱蜻來又去·일진주청래우거) / 높아지는 하늘 마른 햇살에 가을이 생겨나네.(雲高日燥見秋生·운고일조견추생)
18세기의 시인 이규상(李圭象·1727~1799)의 시 ‘농가의 노래(田家行)’로, 그의 저서인 ‘일몽고(一夢稿)’에 수록돼 있다. ‘일몽고’는 18세기 조선의 내로라하는 인물들을 망라한 인물지로, 조선 후기 인물들에 관한 충실한 기록으로 꼽힌다.
시인의 집에는 빨간 맨드라미와 연분홍색 또는 빨간색의 봉선화가 피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푸른 박 넝쿨이 늘어져 있고 거기에 자줏빛 가지가 엉켜 달려있다. 시골의 여름날 어느 집에서나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이러한 고요한 풍경에 한 떼의 고추잠자리가 몰려와 선회하다가 어디론가 가버린다. 이때 시인의 시선은 하늘로 향한다. 마른 햇살이 비치고 뭉게구름 사이로 하늘이 더욱 높아져 가고 있다. 푸른 하늘이 곱다. 시인은 “아, 가을이 어느덧 이렇게 와 있구나”고 느낀다.
고추잠자리는 가을이 오고 있음을 알려주는 전령이다. 요즘은 시끄럽게 우는 매미보다 고추잠자리가 더욱 반가운 때다.
계곡에는 빨간 잠자리가 물을 치느라 바쁘다. 잠자리가 물을 치면서 나는 것을 ‘청정점수(蜻蜓點水)’라고 한다. 선비들은 벼슬과 이익의 유혹에서 몸을 빼지 못하고 허우적대는 것을 두고 청정점수에 비유했다.
서거정은 ‘가을 생각(秋懷·추회)’이라는 시에서 “잠자리는 늦은 시간 햇살에 어지럽고(蜻蜓迷晩色·청정미만색) / 귀뚜라미는 시원한 소리를 보내오는구나.(蟋蟀送寒聲·실솔송한성)/ … / 귀향만큼 좋은 것 없으리니(不如歸去好·불여귀거호)/ 어찌 명성을 지키려고 하겠는가.(何用占時命·하용점시명)”이라고 읊었다.
잠자리 떼 나는 것과 귀뚜라미 소리를 보고 듣고 돈과 명예를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뜻을 피력했다. 가을이 오는 것을 알리는 잠자리를 보고 돈과 권력의 유혹에서 벗어날 것을 생각한 것이다.
사물의 이치를 깨닫는 격물(格物), 그것이다.
시인·고전인문학자·목압서사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