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술을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지만(性本不愛酒·성본불애주)/ 그래도 술 한 병은 놔두고 사네.(猶貯酒一甁·유저주일병)/ 한가한 이들에 대한 겁이 많아(多恐悠悠者·다공유유자)/ 나 혼자 술 깨어 있다 말할까봐.(將我號獨醒·장아호독성)/ 쓸쓸한 매화나무 아래에서(蕭瑟梅樹下·소슬매수하)/ 소리 내어 이소경을 읽는다네.(朗讀離騷經·낭독이소경)/ 홀로 깨어 있을 수 없는 세상이어서(世無獨醒者·세무독성자)/ 매화에게 들려주는 길밖에 없다네.(要使梅花聽·요사매화청)/ 시를 탐하는 버릇이 두보보다 심하여(耽詩癖於杜·탐시벽어두)/ 평생 고생을 마다하지 않는다네.(百年不憚勞·백년불탄로)/ 산자락 다 한 곳에 다다른 줄 알았는데(謂到山盡處·위도산진처)/ 더 높은 산이 다시 나타나네.(復有一層高·부유일층고)
위 시는 19세기 여항시인 몽관(夢觀) 이정주(李廷柱)의 ‘우연히 지은 시(偶題·우제)’로, 그의 문집인 ‘몽관시고(夢觀詩稿)’에 들어 있다. 그는 당대에 뛰어난 여항시인으로 추사 김정희의 제자였던 이상적(李尙迪)과 인척관계였다. 시 세계는 대체로 만당풍(晩唐風)으로 기울어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소경(離騷經)’은 중국 전국시대 시인 굴원(屈原)이 지은 시이다.
이정주는 시문에 탁월하였지만 중인이라는 신분에 자의식을 많이 느낀 것 같다. 조선 시대에도 시인은 술을 많이 마셨던 모양이다. 하긴 어느 시대라도 시인과 술을 떼어놓지 못하였을 것이다. 천상병 시인은 시 ‘막걸리’에서 “… 막걸리는 술이 아니고/ 밥이나 마찬가지이다/ 밥일 뿐만 아니라/ 즐거움을 더해주는 하느님의 은총인 것이다”고 하지 않았던가. 젊은 시절 필자와 시작(詩作) 활동을 하던 시인들에게도 술은 밥 이상이었다.
이정주는 술을 원래부터 좋아하지 않지만 집에 늘 술 한 병을 두고 산다. 술을 좋아하는 시인들이 오면 함께 어울려야 한다. 혼자만 깨어 있으면 오해를 살 수도 있다. 그러다 보니 자기 속마음을 풀어놓을 수 있는 대상은 매화나무밖에 없다. 홀로 깨어 있는 사람은 외롭다. 또한 자신이 어느 경지에 이르렀다고 생각하는 순간 더 높은 산이 나타난다. 예나 지금이나 인생이 원래 그런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