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도는 손바닥처럼 평평하고(鵲島平如掌·작도평여장)/ 멀리 금오산은 마주하여 우뚝하네.(鰲山遠對尊·오산원대존) / 바닷물 들어오니 깊이가 한량없어(終朝深莫測·종조심막측)/ 자고로 이치 궁구하기 어렵다네.(自古理難原·자고리난원)/ 숨 한 번 쉬는 새 땅이 포구가 되고(呼吸地爲口·호흡지위구)/ 조수 들락거리니 산은 문이 되네.(往來山作門·왕래산작문)/ 예부터 지금까지 말들이 많지만(古今多少說·고금다소설)/ 참으로 누구의 말이 옳은 것인가(破的竟誰言·파적경수언)
위 시는 퇴계 이황의 ‘곤양에서 관포 어득강 군수를 모시고 작도(까치섬)에서 노닐면서 조석을 이야기하다’(昆陽陪魚灌圃遊鵲島是日論潮汐·곤양배어관포유작도시일론조석)로, 그의 시를 집대성한 ‘퇴계시대전(退溪詩大全)’(포항공대·1992)에 수록돼 있다. 조선 중종 때 경남 곤양(현 사천) 군수인 64세의 관포(灌圃) 어득강(魚得江·1470~1550)이 아직 대과에 급제하지 못한 33살의 퇴계 이황을 곤양으로 초청했다. 1533년 이른 봄 33세의 퇴계는 고향 예안(현 경북 안동)을 떠나 남쪽으로 발걸음하였다. 아들뻘의 젊은 선비를 어득강이 초청한 이유는 무엇일까? 퇴계의 글재주와 덕망을 들은 바 있어 나이를 뛰어넘어 교유하고 싶어서였다. 퇴계는 한 달여 만에 곤양 땅에 도착했다. 다음날에는 곤양에서 10리쯤에 있는 작도로 가 생선회를 술안주로 놓고 어 군수 및 지역유림들과 조석(潮汐)에 대하여 의견을 나눴다. 섬 남쪽으로 양쪽에 산이 솟아있었다. 그 사이로 밀물이 들면 주변을 빙 둘러 바다가 되고, 썰물이 나면 갯벌이 되었다. 퇴계는 처음 접하는 바닷가의 조석에 대해 솔직하게 그 이치를 알지 못하겠다며 겸허했다. 1928년에 작도가 있는 사천시 서포면 유림이 중심이 되어 퇴계가 시를 짓던 장소에 작도정사(鵲島精舍)를 지었다. 이후 1938년 일제가 간척사업을 벌여 작도는 육지 속 작은 동산이 되었다.
필자는 엊그제 도롯가 언덕 위에 있는 작도정사를 찾았다. 작도정사유계회가 ‘선사 퇴도 이선생(先師退陶李先生)’이라 쓴 신주로 퇴계 선생을 향사하고 있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해마다 음력 4월에 채례를 지내는데, 채례 후 점심상에 꼭 생선회를 내놓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