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逢春景益佳·봉춘경익가
수승이라 이름 새로 바꾸어(搜勝名新煥·수승명신환) / 봄 맞으면 경치 더욱 좋으리.(逢春景益佳·봉춘경익가) / 먼 숲 꽃망울은 터지려 하고(遠林花欲動·원림화욕동) / 그늘진 골짜기는 눈에 묻혔네.(陰壑雪猶埋·음학설유매) / 좋은 경치와 좋은 사람 만나지 못해(未寓搜尋眼·미우수심안) / 가슴 속 회포만 더해 가네.(唯增想像懷·유증상상회) / 훗날 한 동이 술 안고 가(他年一尊酒·타년일준주) / 큰 붓으로 구름벼랑에 시 쓰리라.(巨筆寫雲崖·거필사운애)
위 시는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의 ‘수승대라는 이름을 주며’(寄題搜勝臺·기제수승대)로, 그의 문집인 ‘퇴계집 별집’ 권 1에 들어 있다.
이황은 위 시에서 선비들을 만나지 못해 안타까운 마음과 함께 거창의 위천 가운데 우뚝한 거북 형상 바위 ‘수송대(愁送臺)’의 이름을 ‘수승대(搜勝臺)’로 고치면 좋겠다고 적었다. 이 바위가 있는 지역이 예전에 신라와 백제의 경계여서 서로의 사신을 아쉽게 보낸다고 하여 바위 이름이 ‘수송대(愁送臺)’였다.
1543년 연초에 이황은 수송대에서 멀지 않은 거창 마리면 영송(迎送)마을에 내려와 살고 있던 장인인 권질(權礩·1483~1545)의 집에 머물고 있었다. 권질은 1504년(연산군 10) 연산군의 실정(失政)을 폭로한 언문투서사건이 일어나자 거제도로 유배되었다가 1506년 중종반정이 성공한 뒤 풀려나 복권되어 현릉참봉 등을 역임했다.
그러나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 이후 다시 경북 예안(禮安)으로 유배됐다가 17년 후 유배가 풀려 가족을 이끌고 처가 마을인 영승으로 옮겨 살고 있었다.
이 마을에 머무는데 위천 변에 구연서원과 요수정을 경영하던 황산마을 요수(樂水) 신권(1501~1573)의 초청을 받는다. 그리하여 이황은 1543년 1월 7일 거창 원학동 선비들과 만나기로 약속돼 있었다. 하지만 이황은 급한 용무로 상경해야 해서 약속을 못 지키고 ‘수송대’ 명칭을 ‘수승대’로 부르자고 운을 떼는 오언시만 건네주었다.
이 바위에 이황의 위 시와 다른 시인들의 시가 많이 적혀 있다. 필자는 엊그제 부산에서 오신 독자 두 분과 수승대를 둘러보았기에 위 시를 언급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