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쪽 고을 두루 다니느라 길은 멀고도 멀었는데(行盡南州路轉悠·행진남주로전유) / 이제야 비로소 영호루에 이르렀네.(如今始到映湖頭·여금시도영호두) / 사람들 굶주려 성 밖에는 솔 껍질 벗기는 이 많고(人飢郭外多松採·인기곽외다송채) / 해마다 가뭄 들어 들판에는 보리 거두는 것조차 적네.(歲旱田間少麥收·세한전간소맥수) / 내 마음에는 오직 가난한 백성들 안타까워하는 생각뿐(只有一心傷白屋·지유일심상백옥) / 다시 무슨 흥취가 있어 화려한 누각에 오르겠는가.(更將何興上朱樓·갱장하흥상주루) / 그런데 지난밤 때맞춰 내린 단비는 누구의 힘이었던가.(前宵好雨伊誰力·전소호우이수력) / 태수가 어질다고 하니 백성들 일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구나.(太守云賢可不憂·태수운현가불우)
위 시는 약천 남구만(1629~1711)의 ‘안동(安東)에서 성 사군(成使君) 후설(後卨)의 영호루(映湖樓) 운(韻)에 차운하다’(安東次成使君 後卨 映湖樓韻·안동차성사군 후설 영호루운)로, 그의 문집인 ‘약천집(藥泉集)’ 권 1에 들어 있다.
성후설(1615~1673)은 1651년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1662~1664년 무렵에 안동부사를 지냈다. 남구만은 함경도관찰사·형조판서·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1662년 영남에 어사로 나갔는데, 위 시는 이 무렵 읊은 것으로 보인다.
위 시에는 먼 길을 온 나그네의 감회와 굶주린 백성의 현실, 그리고 어진 정치에 대한 희망이 담겨 있다. 특히 영호루라는 명승을 읊으면서도 아름다운 경치를 거의 묘사하지 않고 백성의 굶주림을 시의 중심에 두고 있다. 지난밤에 단비가 내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한다.
영호루는 경상북도 안동시 정하동에 있는 고려시대 누각으로, 낙동강변에서 시내와 강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대표 명소이다. 고려 공민왕이 친필로 현판(題額)을 적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의 현판은 1934년의 홍수 때 유실되었다가 그해 가을 경상북도 구미 부근의 강물에서 회수한 것이다. 영호루는 영남의 대표적인 누각 중 하나이다.
필자는 대학생 때 처음 영호루를 답사했고, 그 후 서너 차례 더 간 기억이 있다. 그동안 너무 가물었는데, 그제 밤부터 단비가 내려 얼마나 반가운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