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득히 새벽이 열린 뒤(漠漠晨開後·막막신개후)/ 망망하게 비가 막 개었네.(茫茫雨霽初·망망우제초)/ 하늘과 땅 아직 나뉘지 않은 듯한 곳(玄黃未分處·현황미분처)/ 바라보니 선천도와도 같구나.(看向先天圖·간향선천도)
위 시는 조선 전기의 문신 월헌(月軒) 정수강(丁壽崗·1454~1527)의 ‘새벽 안개’(曉霧·효무)로, 그의 문집인 ‘월헌집(月軒集)’ 권 1에 들어 있다.
아침 산안개 속에서 천지의 처음을 보았다고 읊었다. 아침 일찍 산에서는 전날과 전혀 다른 세상을 만날 때가 있다. 비가 내린 다음 날이면 더욱 그렇다. 골짜기마다 안개가 피어오르고 능선은 보였다 사라지기를 거듭한다.
앞의 두 구절은 새벽 풍경이다. ‘막막(漠漠)’하고 ‘망망(茫茫)’하다는 말에서 비가 갠 직후 천지를 뒤덮은 안개의 모습을 눈앞에서 보는 듯하다. 산도 보이지 않고 들도 보이지 않는다. 하늘과 땅의 경계마저 희미하다.
위 시의 묘미는 뒤의 두 구절에 있다. “玄黃未分處(현황미분처)”, 하늘과 땅이 아직 나뉘지 않은 곳이라는 말이다. ‘현황(玄黃)’은 오래전부터 하늘과 땅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됐다. ‘천자문’ 첫머리의 “天地玄黃(천지현황)”도 바로 그것이다. 정수강은 안개로 뒤덮인 아침 풍경을 하늘과 땅조차 아직 갈라지지 않은 태초의 세계처럼 바라보았다.
그래서 마지막에 “看向先天圖(간향선천도)”, “바라보니 선천도와도 같다”고 했다. ‘선천(先天)’은 세상의 온갖 사물이 형상을 갖추기 이전의 근원적 질서를 가리킨다. 눈앞의 안개를 바라보다가 시인의 생각이 천지가 처음 열리던 순간까지 뻗어간 것이다. 자연의 작은 현상 하나에서 우주의 이치를 생각한 옛 선비의 시선이 이 짧은 시 속에 들어 있다.
산은 그대로 있는데 보였다가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우리 삶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길이 없는 것은 아니다. 안개 속에도 산은 그 자리에 있고, 길 또한 그 자리에 있다. 다만 우리가 잠시 보지 못할 뿐이다.
추석이 지난 어제와 오늘 아침에 목압서사에서 산안개를 한참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위 시를 떠올리며 ‘아, 시가 깊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