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寒徹錦衾香夢破·한철금금향몽파
수유 꽃 떨어지고 우물가 오동잎 날리는데(茱萸花墮井梧飄·수유화타정오표) / 지붕 위에는 서리 짙어 밤기운이 세차다.(蚩尾霜多夜氣豪·치미상다야기호) / 찬 기운이 비단 이불을 뚫고 들어와 향기로운 꿈을 깨우니(寒徹錦衾香夢破·한철금금향몽파) / 달 밝은 밤 높은 하늘에서 기러기 울음 들려온다.(月明仙掌鴈聲高·월명선장안성고)
위 시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문장가인 택당(澤堂) 이식(李植·1584~1647)의 ‘흥에 겨워 궁중의 사계절 노래 형식을 본떠 짓다(戲效宮中四時詞體·희효궁중사시사체)’로,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된 그의 문집인 ‘택당선생유고간여(澤堂先生遺稿刊餘)’에 들어 있다. 이식은 광해군과 인조 대에 활동한 문신으로, 문장에 뛰어나 당대의 대표적인 문인으로 평가받았다.
며칠 사이 아침저녁 공기가 부쩍 차가워졌다. 낮에는 햇살이 따뜻하지만 밤이 깊어지면 쌀쌀하다. 이제는 가을 한가운데 들어섰음을 느낀다. 이식은 이러한 가을밤 찬 기운을 위 시처럼 실감 나게 읊었다. ‘戲效宮中四時詞體’라는 연작 가운데 가을을 노래한 한 수이다.
셋째 구의 ‘한철금금향몽파(寒徹錦衾香夢破)’는 가을이 깊어졌음을 표현하였다. ‘한철(寒徹)’의 ‘철(徹)’은 ‘꿰뚫다’는 뜻이다. 찬 기운이 방 안에 들어온 정도가 아니라 두툼한 이불 속까지 뚫고 들어온 것이다.
앞의 두 구절 역시 가을 풍경을 눈앞에 펼쳐놓는다. 수유꽃은 떨어지고 우물가 오동잎은 바람에 날린다.
마지막 구절을 보면 잠에서 깨어나니 달은 밝고, 높은 하늘에서는 기러기 울음이 들린다. 옛 시에서 기러기는 가을을 알리는 대표적인 자연물이었다. 서리, 달빛, 오동잎, 기러기 울음이 어우러지면서 깊어진 가을밤의 정취가 더욱 선명해진다.
계절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피부로 느낀다. 낙엽과 단풍을 보면서 가을을 알기도 하지만, 새벽녘 이불 밖으로 나온 발끝이 차갑게 느껴질 때 우리는 비로소 가을이 깊어졌음을 실감한다.
요즘 지리산에는 바람이 차고, 냉기가 묻어난다. 추위를 많이 타는 필자는 사흘 전부터 전기장판을 깔고 두툼한 겨울 이불을 덮고 잔다. 가을은 어느새 그렇게 깊어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