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洲荻花翻雪欲昏·주적화번설욕혼
병들어 누운 채 해를 넘기며 홀로 문 닫고 지냈는데(病臥經年獨掩門·병와경년독엄문) / 오늘 아침 말을 채찍질하여 들 밖으로 나섰네.(今朝鞭馬出郊原·금조편마출교원) / 언덕의 단풍은 서리에 물들어 취한 듯 짙고(岸楓霜染濃似醉·안풍상염농사취) / 물가 억새꽃 흩날리니 눈발 속인 듯 어스름하네.(洲荻花翻雪欲昏·주적화번설욕혼)
위 시는 조선 중기의 문신 지퇴당(知退堂) 이정형(李廷馨·1549~1607)의 ‘양근가는 길에’(楊根途中·양근도중)로, 그의 문집인 ‘지퇴당집(知退堂集)’에 들어 있다.
양근은 오늘날 양평 일대이다. 이정형은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헌·이조참판 등을 지냈으며 임진왜란을 직접 겪었다.
가을이 깊어 가면 산과 들의 색깔도 하루가 다르게 달라진다. 단풍이 들어가는 산기슭도 아름답지만, 바람 부는 강가나 들녘에서 한꺼번에 몸을 뒤척이는 억새를 바라보는 맛 또한 각별하다. 햇빛을 받은 억새꽃은 희게 빛나다가 바람이 불면 어느 순간 눈발처럼 흩날린다.
이정형도 어느 가을날 길에서 그런 풍경을 만났다. 그는 병으로 오랫동안 문을 닫고 지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아침 모처럼 말을 타고 교외로 나갔다. 오랜 병석 끝에 만난 바깥세상이었으니 눈에 들어오는 가을 풍경 하나하나가 새삼스러웠을 것이다.
“岸楓霜染濃似醉(안풍상염농사취)”, 언덕의 단풍은 서리를 맞아 마치 술에 취한 사람의 얼굴처럼 붉다. 이어지는 마지막 구절에서 “洲荻花翻雪欲昏(주적화번설욕혼)”라고 했다. 억새꽃이 바람에 뒤집히며 날리는데 마치 흰 눈이 내려 천지가 어스름해지는 듯하다는 것이다. 언덕에는 서리 맞은 붉은 단풍이 있고, 물가에는 눈처럼 흰 억새꽃이 있다. 시인은 가을이라는 말을 거듭하지 않아도 단 네 구절로 늦가을 들판 전체를 보여주고 있다.
요즘 우리나라 어디든 억새가 한창이다. 지리산 필자의 차산 위에도 억새꽃이 아름답게 피어 있다. 어제 함께 한시를 공부하는 분들과 서원과 정자 등에 들러 시를 읽다 합천의 황매산에 가 억새를 구경했다. 햇살이 좋아서인지 억새꽃이 은빛으로 반짝였다. 400여 년 전 이정형이 바라본 물가의 흰 억새가 어제 필자가 간 황매산에서도 여전히 흔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