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바람 속에서 괴로이 시를 읊조리지만(秋風唯苦吟·추풍유고음)/ 온 세상에 내 마음 알아주는 이 드물구나.(擧世少知音·거세소지음)/ 창밖에는 한밤중까지 비가 내리는데(窓外三更雨·창외삼경우)/ 등불 앞에 앉은 내 마음은 만 리 밖을 떠도네.(燈前萬里心·등전만리심)
위 시는 신라 말의 문장가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857~?)이 지은 ‘가을밤 빗속에서’(추야우중·秋夜雨中)으로, 조선 성종 때 서거정 등이 편찬한 ‘동문선(東文選)’ 권 19 오언절구에 수록돼 있다.
가을비가 내리면 사람의 마음도 젖어 든다. 깊어 가는 가을밤, 창밖에는 비가 내리고 방 안에는 희미한 등불 하나가 켜져 있다. 시인은 잠을 이루지 못한 채 자신의 삶을 돌아본다. 그러나 세상 어디에도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드물다. ‘거세소지음(擧世少知音)’이라는 탄식에는 외로운 지식인의 심정이 고스란히 담겼다.
최치원은 경주 출신으로 신라의 육두품(六頭品) 출신 지식인이었다. 어린 나이에 당나라로 유학해 과거에 급제했고, 황소의 난 때는 절도사 고병(高騈)의 막하에서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지어 문명을 떨쳤다. 귀국한 뒤에는 신라의 정치적 혼란을 바로잡고자 개혁안을 제시했으나 뜻을 제대로 펼치지 못했다. 이후 벼슬에서 물러나 여러 지역을 떠돌았다.
이 시가 당나라 체류 시기에 지어졌는지, 귀국 이후 작품인지를 두고는 견해가 갈린다. 어느 쪽으로 보더라도 이 시의 중심에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는 외로움이 자리한다. 셋째 구의 삼경(三更)은 오늘날 밤 11시부터 새벽 1시 무렵이다. 세상이 잠든 시간에도 비는 그치지 않는다. 비는 단순한 자연현상이 아니라 시인의 고독을 더욱 깊게 만드는 존재다.
마지막 구절에서 시인은 몸은 작은 방 안에 머물러 있지만 마음은 만 리 밖으로 달려간다. 고향일 수도 있고, 자신이 이루지 못한 뜻을 향한 마음일 수도 있다. 한 줄 시에 인간의 그리움과 좌절, 끝내 버리지 못하는 희망이 함께 담겨 있다. 지리산에는 그제 밤부터 어제까지 가을비가 내렸다. 가을비는 예나 지금이나 사람을 사색하게 한다. 천 년도 더 지난 최치원의 가을밤이 오늘 우리의 가을밤과 그리 다르지 않은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