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은 오래되어 불당에는 그림도 없고(寺古佛堂無畫圖·사고불당무화도) / 오직 탑 하나 외로이 구름에 기대어 있네.(惟存一塔倚雲孤·유존일탑의운고) / 새벽하늘 은하수는 바야흐로 스러져 가고(曉天星漢政搖落·효천성한정요락) / 텅 빈 골짜기에는 물과 바람이 서로 부딪쳐 울부짖네.(空谷水風相激呼·공곡수풍상격호) / 가까운 마을 대숲 사이로 개 짖는 소리 들리고(村近竹間通吠犬·촌근죽간통폐견) / 공양을 마치자 전각 모퉁이에 까마귀 모여드네.(齋休殿角集神烏·재휴전각집신오) / 골짜기의 수많은 밤나무는 누가 심었는가(萬株洞栗誰栽得·만주동률수재득) / 나무마다 푸르고 누렇게 물들어 경치가 유난히 빼어나네.(樹樹靑黃境絶殊·수수청황경절수).
위 시는 매천 황현(梅泉 黃玹·1855~1910)의 ‘연곡사’(燕谷寺)로, 그의 문집인 ‘매천집(梅泉集)’ 권 1에 들어있다. 그가 23세 때인 1877년에 지은 작품이다.
황현이 지리산 피아골에 있는 연곡사를 찾았을 당시 불당에는 그림조차 없고, 구름에 기댄 탑 하나만 외롭게 서 있었다. 산사에서 마주한 옛 탑은 오랜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한다. 그렇지만 새벽하늘 은하수가 사라져 가고, 깊은 계곡에서는 물소리와 바람 소리가 서로 부딪쳐 울려 퍼진다. 대숲에서는 개 짖는 소리가 들리고 전각 모퉁이에는 까마귀가 모여든다. 정적 속에 자연과 생명의 소리가 어우러진다.
마지막 두 구절에 밤나무가 등장한다. 조선 조정은 1745년 연곡사 일대를 율목봉산(栗木封山)으로 지정했다. 율목봉산이란 왕실의 신주와 신주를 담는 궤짝 등을 만드는 데 필요한 밤나무를 보호하고 관리하던 산이다.
연곡사는 근대사의 아픔도 간직한 절이다. 1907년 의병장 고광순이 이끄는 의병들이 이곳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순절했고, 6·25전쟁 때에도 큰 피해를 봤다. 황현은 1910년 나라를 빼앗기자, 절명시 네 수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호주에서 살고 있으면서 쌍계사 아래 석문마을에 방을 얻어 지리산을 주유하고 있는 김부만(62) 선생과 그제 연곡사를 찾았다. 오랫동안 마음공부를 하며 수행하시는 이점진(李点鎭·65) 선생이 요즘 연곡사에 머물고 계신다. 이 선생과는 거의 매일 얼굴을 본다.